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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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지식인이라는 말이 먼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가 제시하는 정의는 전형적이지만 논의의 여지가 있다.

 

·······지식인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정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 체계 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연관된 분야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이거나 철학적이다.·······

 

  이러한 정의는 내가 보기에 쓸데없이 제한적인 것 같다.·······‘지식인’이라는 용어 속에, 예컨대 수학자나 동식물 연구가나 과학철학자도 포함시키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이 용어의 범위를 일상의 직업과 상관없이 교양 있는 사람들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교양 있는 사람의 문화는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 때문에 살아 있다.(158-159쪽)

 

프리모 레비는 장 아메리가 쓴 같은 제목의 글에 대한 “개괄이자 주해인 동시에 논의이며 비평”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인문학도로서 스스로의 지식인적 정체성을 의식하고 산 장 아메리의 삶이 아우슈비츠에서 무엇이었는지 살피면서 자신의 삶과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 고찰하려는 것입니다.

 

제목만 보면 지식인이 아우슈비츠 안에서 과연 ‘지식인의 책무’를 다했는가를 묻는 것 같지만 실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식인이라는 것이 아우슈비츠에서는 유리한가, 아니면 불리한가?

 

이 다급하고 단순한 실용적 질문은, 아우슈비츠 상황에서, 우리가 흔히 떠드는 ‘지식인의 책무’라는 말이 얼마나 한가하고 느슨한 것인지 폭로하고 있습니다.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마다 지식인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질은 같으나 급박성과 위험성이 훨씬 덜한 우리 상황에서 과연 지식인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어오는 질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은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프리모 레비의 표현처럼 “일상의 직업과 상관없이 교양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전공도 대학도 기준이 아닙니다. “교양” 여부가 기준입니다. 교양은 무엇입니까.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

 

이것이 사전적 의미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 사전적 의미를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

 

사전은 품성을 말하지만 프리모 레비는 행위를 말합니다. 둘을 결합하면,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은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을 지니게 된다, 거꾸로 하면,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가 됩니다. 결국 우리에게 관건으로 다가오는 것은 과연 스스로를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이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만’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고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부터’ 개선하고 성장시키고 쇄신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여 사회 전체로 번져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읽겠지요. 그렇습니다. 지식인은 사회의 모자란 상태를 넉넉하게 채우고, 어린 상태를 자라나게 키우고, 잘못된 상태를 옳게 바로잡는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일을 수행하는 사람만이 지식인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이 모자랍니까. 모자 란 것투성이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공존, 그러니까 함께 살고자 하는 기운입니다. 그 무엇보다 상위 0.1%의 매판 과두들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국가의 부를 독점함으로써 기본적 평등이 송두리째 무너졌습니다. 지배층의 이런 행위는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사회 전반을 불평등의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이라면 이 모자란 상태를 채우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이 어립니까. 어린 것투성이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사회·역사에 대한 민중의 인식 상태입니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지금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사회구조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 거의 전혀 모른 채 맹목의 깊은 골짜기로 미끄러져갑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이라면 이 어린 상태를 키우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된 것투성이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국가적 폭력입니다. 사적 폭력에서 공동체 구성원을 지켜야 할 국가가 도리어 앞장서서 정치와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용병 집단을 대놓고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공포와 불안, 급기야 우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이라면 이 잘못된 상태를 바로잡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지금, 그렇다면 이른바 지식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모자라고 어리고 잘못된 상태가 더욱 격화되는 것을 보면 이른바 지식인들이 이렇다 하게 하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아우슈비츠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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