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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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유용성이·······다.(152쪽)

 

어린 시절 계모나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그 때마다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둥둥 떠다니기고 하고, 산산이 흩어지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쓸데없는 폭력> 장을 읽으면서 자꾸 그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아니, 또다시, 마음이 몸을 떠나 둥둥 떠다니기고 하고, 산산이 흩어지기도 하고,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낭창낭창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옮기는 일이 힘듭니다. 몇 시간을 그저 망연히 앉아 있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뒤로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어제, 그리고 오늘, 그야말로 바닥을 칩니다.

 

쓸데없는 폭력, 이것은 필경 폭력의 극한일 터입니다. 오직 고통을 줄 목적으로, 그러니까 오직 “인간 이하로 비하”하기 위해 가하는 폭력이니 말입니다. 구태여 유용성을 찾는다면 가해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하는 것인데 사실 이 유용성은 가해자 스스로 “인간 이하로 비하”되기 위한 것이므로 유용성을 획득하는 찰나 그 유용성이 파괴되고 마는 무의미한 개념입니다. 인간 이하의 존재에게 ‘유용함’이 당키나 한 말입니까. 그냥, 쓸데없는 폭력은 그 쓸데없음으로 죄악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폭력일 따름입니다. 거기서는 가하는 자나 당하는 자나 마음이 사라졌으니 사람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사회의 최근 7년, 특히 2년은 쓸데없는 폭력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권력과 자본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는’ 복마전이었습니다. 목하 판은 더욱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근본 가치를 모조리 희화戱化하며 저들은 마침내 스스로도 미쳐가고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자기네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습니다. 광란의 질주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 사이 국밥 값을 남기고 한 독거노인이 죽었습니다. 마지막 월세를 남기고 세 모녀가 죽었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26명이 죽었습니다. 단원 아이들 250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에 대체 어떤 유용성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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