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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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에서 노동은 순전히 박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지, 실제로 생산 목적에는 쓸모없는 것이었다.·······노동이란 말의 일반적 의미에서 봤을 때 체제의 비천한 적수들은 노동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노동은 고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라거의 SS들은 교묘한 악마라기보다는 둔감한 야수들이었다. 그들은 폭력적이 되도록 교육받았다.·······‘적’에게 굴욕감을 주고 고통을 겪게 만드는 것이 날마다 하는 그들의 업무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하지도 않았고,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146-147쪽)

 

나고 죽는 것, 숨 쉬는 것, 성을 나누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하는 것은 인간에게 범주적인categorical 거룩함입니다. 이 가운데 일하는 것, 그러니까 노동은 특별히, 거의 유일하게 인간의 사회적 속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노동의 거룩함이 가장 숭고하고 역동적인 사건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한편, 거대하고 광포한 지속성을 지닌 폭력으로 말미암아 훼손되기도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동은 본질적으로 생산을 향합니다. 생산은 생명의 연속과 확산을 향합니다. 생명의 연속과 확산은 노동의 거룩함이 번져가는 과정이자 결과입니다. 생명의 연속과 확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노동은 그 자체로 고통이며 폭력입니다. 아우슈비츠의 노동이 그랬습니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노동이 또한 그렇습니다. 생명을 훼절하고 위축시키는 노동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가장 참람한 거역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참람한 거역으로서 노동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보다 더욱 해괴한 거역이 있습니다. 자칭 거룩함의 본진인 종교가 거룩함을 훼절하고 위축시키는 데 앞장선다는 경악할만한 사실 말입니다. 종교 없이 거룩할 수는 있지만 종교가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거대종교의 노동인 예배·미사·예불과 그 연장에 있는 종교인들의 사회적 실천이 그 어떤 거룩함을 빚어내고 있습니까.

 

 

내일이 이른바 성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이 성탄을 전유하도록 명명한 것 자체가 이미 거룩함의 파훼이거니와 더더구나 이 땅의 교회, 특히 개신교가 세속의 힘과 돈에 무릎 꿇은 상황에서 오늘,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의 흥청거림부터 내일 성탄 축하 의식까지, 거기 거룩함이 깃들 수 있을까요. 거룩함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종교적 노동이 폭력이며 고통이란 사실을 저들이 알고 있기는 한 걸까요.

 

30대에서 40대를 넘어오면서 제게는 삶의 일대전환이 있었습니다. 한의학도로 살기 위해 기독교 성직의 길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직후 제 직업은 우유배달이었습니다. 교회 밖 첫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는 우유 리어카를 점검했습니다. 교회 밖 첫 ‘크리스마스’ 새벽에 저는 우유 리어카를 끌었습니다. 배달 끝나 마지막 빈 박스를 리어카에 내려놓는 순간 거기서 저는 아기예수를 보았습니다. 비로소.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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