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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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작업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1분 이상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문신의 상징적 의미는 모두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즉, 이것은 지워지지 않는 표지標識(번역에는 표식이라 되어 있으나 너무나 흔히 범하는 잘못이라 정색하고 바로잡습니다.)다. 이곳에서 너희들은 결코 나갈 수 없다. 이것은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히는 낙인이다. 너희들은 바로 그런 것이 되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이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이름이다. 문신의 폭력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이었고 순전한 모욕이었다. 바지에, 상의에, 겨울용 망토에 천으로 꿰매 붙인 숫자 세 개로 충분치 않았던가? 아니, 충분하지 않았다. 그 이상이 필요했다. 무고한 사람이 살 속에 새겨진 자신의 형벌을 느끼도록, 말의 형태가 아닌 다른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흔히 젊은이들이 나에게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질문하는데 이는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143-144쪽)

 

중국 사대기서의 하나인「수호전」에는 형벌刑罰 문신이 등장합니다. 양산박 108호걸 가운데 무송, 양지, 임충 등 귀양살이를 하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형벌 문신인 자자刺字형을 받았습니다. 죄상을 얼굴 혹은 팔에 새겨 넣어서 범죄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무엇보다도 수치심을 주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명 공개'나 '전자 발찌'와 같은 의미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호전」에는 다른 문신도 등장합니다. 예컨대 구문룡九紋龍 사진史進은 9마리의 용을, 화화상花和尙 노지심魯智深은 꽃들을 온몸에 새겨 넣었습니다. 호걸들이 자신의 개성을 표시하기 위해 문신을 새겨 넣는 것입니다. 사실 어찌 보면 형벌 문신에 대한 능동적 역발상의 표현이자 저항이랄 수도 있습니다.

 

옛 중국에는 형벌과는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닌 문신이 또 있었습니다. 노예에게 새기는 낙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증명서였습니다. 타인의 노예라는 것만큼 잔혹한 형벌이 다시 있을까요.

 

아우슈비츠 포로들에게 가해진 문신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살될 운명인 짐승들과 노예들에게 찍히는 낙인”이자 “살 속에 새겨진 자신의 형벌”이었습니다. 무고한 이들에게 가한 문신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이었고 순전한 모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통치 집단과 그 마름들은 세월호사건의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들에게 “놀러가다 사고로 죽은 애들”이라는 영원한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게다가 유족들에게는 “종북”이라는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또 최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희망한다는 말을 한 이효리에게는 “좌효리”라는 문신을 새겨 넣었습니다.

 

유족들도 이효리도 억울하고 분할 것입니다. 이 때 누군가 이들에게 ‘달리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왜 문신을 지우지 않느냐’고 프리모 레비에게 물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단호한 반문을 기억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유족들도 이효리도 쉽사리 이렇게 반문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 그렇습니다. 지금 광기어린 폭력이 해일처럼 우리를 덮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공포와 불안의 노예로 마음에 문신 새겨진 채 형벌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분명히 이 문제는 정치 그 너머, 인간의 인간다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다움 그 너머, 인간 생명 자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늘 내가 숨을 죽이면 내일은 누군가 목을 조이러 들이닥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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