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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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수용소에서 하루에 한두 번 점호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호명하는 점호는 아니었다.·······점호는 날씨와 상관없이 실시되었고(물론 옥외에서)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다. 셈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탈출이 의심되면 심지어 스물네 시간이나 그 이상까지 이어졌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혹한의 날씨에는 노동 그 자체보다 더 심한 고문이 되었고, 저녁이면 노동의 피로에 고스란히 보태졌다. 점호는 무의미하고 의례적인 행사로 인식되었다.(138-139쪽)

 

(2) 침대 정리는 일어나자마자 막사 전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모든 침대는 1, 2분 안에 정리되어야 했다. 광란의 순간이었다. 병사의 공기는 뿌연 먼지와 팽팽한 긴장감, 온갖 언어로 주고받는 욕설로 가득했다. ‘침대 정리’·······는 엄격한 철칙에 따라 시행되어야 할 신성한 작업이었다.·······정리와 규율의 상징이었다. 침대 정리를 잘못했거나 잊어버린 사람은 공개적으로 엄하게 처벌받았다.·······혹시라도 들쑥날쑥한 것들은 센티미터까지 맞춰가며 다시 옮겼다. 고통 이상의 이러한 정리벽은 터무니없고 기괴해보였다.(141-142쪽)

 

아우슈비츠가 독일 군대의 희화戱化라는 사실은 프리모 레비가 이미 밝힌 바입니다. 군대란 전쟁, 그러니까 생사를 건 싸움에 존재의의가 있는 조직입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반복해서 하는 것이니만큼 시공간적 일치, 그러니까 절대통제 아래 명령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는 전쟁을 위한 군대가 아닙니다. 군대가 아닌 포로들에게 이런 식의 통제를 가한다는 것은 오직 통제를 위한 통제, 그러니까 고통을 주기 위한 쓸데없는 폭력을 가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오직 인간만이 만들 수 있는 이 쓸데없는 폭력의 가닥은 둘입니다.

 

하나는 점호입니다. 점호는 통시적diachronic 일치, 그러니까 동일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어제하고 오늘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통제입니다. 일치가 확인될 때까지 시간을 무제한 사용합니다. 이런 폭력을 우리 현실의 정치공학으로 풀어보면 점호는 이데올로기 조작을 통한 통치의 영속성 추구행위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역사 왜곡입니다. 일본·중국은 가학적으로 하는데 반해서 대한민국 지배집단은 피학적으로 그 짓을 합니다. 독립혁명가들을 깡패·테러리스트로 몰고, 도리어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거나 부역한 매판인사들을 영웅·신으로 떠받드는 역사 교과서를 아이들한테 들이미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침대정리입니다. 침대정리는 공시적synchronic 일치, 그러니까 단일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여기하고 저기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간 통제입니다. 일치가 확인될 때까지 허용된 시간은 딱 1, 2분입니다. 이런 폭력을 우리 현실의 정치공학으로 풀어보면 침대정리는 시스템 조작을 통한 통치의 공고성 추구행위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헌법기관 왜곡입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통령이 3인, 대법원장이 3인, 국회가 3인을 뽑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여당 몫이 1인이며, 여야합의로 1인을 뽑는다는 데 있습니다. 대통령이 사실상 8인의 임명권을 행사합니다. 민주주의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인가, 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소수의 탐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차선의 장치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민주주의조차 못되는 제도를 유지할 이유는 더욱 없습니다. 복잡하고 이론적인 쟁점과 무관하게 이런 상태로 말미암아 사람이 떼거지로 죽어나가고 있다면 문제는 이미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이른 것입니다. 자살로 위장된, 사고로 은폐된 제노사이드를 정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를 스스로 포기한, 아니 거절한 지배집단은 본질상 범죄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범죄를 가리기 위해 약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비겁하고 치졸한 공작을 하면서 저들은 언제나 강박적으로 일치를 선동하고 협박했습니다. ‘국론통일’이라는 말이 일세를 풍미하더니 뒤를 이어 ‘국격’이 득세했고 지금은 ‘국기國紀’가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 시공간이 일사불란하게 통제되고 있습니다. 우리역사는 지금 점호 중입니다. 우리사회는 여기 침대정리 중입니다. 죽임의 행렬은 끝이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죽임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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