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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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소통의 측면에서도, 아니 오히려 의사소통의 결여라는 측면에서도 우리 생존자들의 경험은 특이하다.·······

  우리는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소통불가능성을 경험했다.·······이탈리아 보안국 관리들이 마지못해 SS 당국에 우리를 넘겨주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우리는 검은 패치를 단, 경멸을 드러내던 남자들과의 첫 접촉에서부터 독일어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생존의 분수령이 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검은 남자들은 무시무시하고 경악을 금치 못할 방식으로 반응했다.·······

  만약 누군가 머뭇거리면(모두가 머뭇거렸다. 말도 알아듣지 못했고, 또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먹세례를 퍼부었고, 이것이 같은 언어의 다른 형태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생각을 소통하기 위해 언어능력을 구사하는 것, 곧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필요충분의 기제는 여기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저들에게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하나의 신호였다. 소나 노새가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고함이나 주먹질이나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독일어를 모르는 포로들 대부분은·······도착한 지 10~15일 안에 죽었다. 언뜻 보기에는 굶주림과 추위, 피로, 병 때문인 것 같지만, 좀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정보의 부족이 주된 이유였다.(105-110쪽)

 

·······인간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언어에 대한 폭력도 행해진다·······(116쪽)

 

한의사가 임상 현실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일 가운데 하나는 이곳저곳 양의 진료소를 떠돌다 누군가에게서 “침이나 한 번 맞아보지 그래” 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환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왜 이런 거예요?”

 

이 말은 무엇보다 “어디 고쳐봐라”의 다른 표현이지만 이 의중이 의문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곡절이 있습니다. 도대체 양의들이 알아듣게 말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악의 여부와 상관없이 대체로 전문가 집단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그러니까 타인에게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누리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다만 의료의 사회적 행태 차원에서만 논의될 문제가 아닙니다. 의학 본질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정보가 진단의 영역 넘어 치료 효과와 직접적인 연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이 그 아픈 이치를 알고 있느냐 여부에 따라 치료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의학적 정보가 진단자의 전문적 진단 영역에 볼모잡혀 있으면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보로서 의학은 의자와 환자 사이에 공유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겠습니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그 통증을 잡기 위해 곧바로 ‘치료’에 돌입하는 것이 의자, 특히 서구의학으로 치료하는 자 대부분의 습관적 행위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우선, 통증 그 자체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의학적 오류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통증은 자연치유반응입니다. 통증을 없애려고 달려드는 것은 통증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거꾸로 통증을 아주 미세하게 강화하면 자연치유력을 돕는 것이 되어 치료 속도가 빨라집니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의학적 치료행위는 침습·공격적입니다. 다짜고짜 이런 침습·공격을 받으면 몸도 마음도 그것을 폭력으로 해석합니다. 치료가 오히려 트라우마trauma를 남기게 되는 이치입니다.

 

이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길이 있습니다. 정보 내지 지식의 전달 자체가 가장 우선적이고 섬세한 치료 수단이라는 진실을 알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영국 왕실병원이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는 동종요법의 본질이 바로 정보 치료입니다. 한의학의 침과 한약의 기본적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은 ‘말’입니다. 의자와 환자 사이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통해 고통의 내력과 진실이 있는 그대로 환자에게 알려져야 합니다. 이 ‘말’에는 음성적이지 않은 ‘몸말’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저는 대부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거나, 손바닥으로 쓸어주거나 다독거린 뒤에 시침施鍼합니다.

 

잘못된 교과서적 의학이 의료 현장에서 이런 실수, 아니 실패를 양산해낼진대 하물며 대놓고 폭력으로 정보를 차단하는 아우슈비츠가 어찌 신속·과감하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독일어를 모르는 포로들 대부분은·······도착한 지 10~15일 안에 죽었다. 언뜻 보기에는 굶주림과 추위, 피로, 병 때문인 것 같지만, 좀 더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정보의 부족이 주된 이유였다.

 

인간 존재에게 언어, 그러니까 정보가 얼마나 치명적 문제인가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폭력으로서 언어가 몰아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공포, 졸지에 허물어지는 인간의 존엄, 압도적 절망·······어찌 격렬한 죽음의 에너지가 아닐 수 있었겠습니까. 가스실이 아니어도 그냥 그렇게 선 자리에서 얼어붙어 죽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죽음이 세월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와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경찰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죽음이 나타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성실히만 살아도 행복을 느끼는 날이 올까요.

 

권력집단은 침묵으로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키다가 입을 열면 자기 말만하고 다시 입을 닫습니다. 침묵 사이에 나온 그 짧은 단호한 말마저 거짓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일이 감히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요.

 

·······인간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언어에 대한 폭력도 행해진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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