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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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좀 더 광범위한 수치심이 있다. 곧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인간 종, 곧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고통은 어떤 비용이나 노력도 필요치 않은, 무에서 생겨나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101-102쪽)

 

수치심에 관한 프리모 레비의 고찰은 이제 마지막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인간세계,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그 자체, 그러니까 존재론적 수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무에서ex nihilo 고통을 창조해내는 무한한 잠재력, 그러니까 전능omnipotence을 지닌 존재라는 진실이 거부할 길 없는 육중함으로 던져주는 수치심입니다. 가히 숨 멎는 수치심입니다. 인간 존재에 결속된 수치심, 아니 인간 존재 자체인 수치에 관한 절대통찰입니다.

 

인간은 수치의 존재이므로 인간인 한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수치의 존재인 것은 고통 창조력에서 연유합니다. 그렇게 창조한 고통을 악의적으로 타인에게, 다른 종적 생명에게 찔러 넣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필연적으로 고통에게 찔리고 맙니다.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고통에서 전능한 인간이 수치를 알아차리는 수치심마저 잃으면 더는 갈 곳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수치심이므로.

 

마지막 순간을 괄호 치는 인간이 운명을 바꿉니다. 그들은 수치의 존재론을 정치경제학으로 전화시킵니다. 인간의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전화시킵니다. 공존의 문제를 수탈의 문제로 전화시킵니다. 전능한 존재가 자기 수치를 의도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전지omniscience를 거절할 때 악마가 됩니다. 악마의 메커니즘인 이 세상에 대한 수치심, 그 살 떨리는 최후의 수치심으로 프리모 레비는 1987년 4월 11일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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