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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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본다. 그런데 아니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자신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증언을 했다.·······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증언이 생존의 특권을, 그리고 큰 문제없이 여러 해를 사는 특권을 내게 가져다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95-99쪽)

 

이 리뷰20에서 「맹자」<곡속장觳觫章>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직감하고 두려움에 떠는 소를 보며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일으킨 어느 왕의 이야기였습니다. 떠는 소를 보고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 눈앞에서 죽임 당하는 것을 보는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자기 대신 살해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기가 죽였다고, 그러니까 자기가 그 죽어간 사람에게 카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프리모 레비 눈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자신의 용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 완전한 증인들, 원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의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으로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영원히 기려져야 할 용기가 순간의 덧없음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완전한 증언이 완전한 침묵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워야 할 원칙이 꺾여버린 것입니다.

 

범죄는 아니지만 비겁함으로 살아남은 적자適者들이 불완전한 증인으로서 예외의 증언을 할 때, 또 그 증언 덕택에 편안히 살아간다고 느낄 때, 그것은 그대로 괴로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권에 걸맞은 결과가 보이지 않는 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의 용기가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그렇게 움직여서 이루어진 원칙들이 증언으로 이어지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의 징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증언한 것일 텐데 그런 징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 아닐는지요. 프리모 레비의 절망이 영원으로 흘러들어가는 여울목에 놓인 통찰입니다. 마침내 이 절망은 그의 죽음에 가 닿았을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증언을 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도,

 

·······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최후까지 애써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절대의 벽이 있습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완전한 증언이 원천봉쇄 된 상황에서 역사는 무심히 ‘제 길’을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역사의 ‘제 길’은 최고의 사람들이 침묵 속에 죽어가는 일을 되풀이하는 방향으로 고정됩니다. 그것을 역사의 법칙이라 합니다. 역사의 법칙은 모든 역사적 특이점을 잡아먹습니다. 특이점을 잡아먹힌 역사는 맥락 없이 미끄러집니다. 맥락 없이 미끄러지는 역사는 시간을 공간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공간의 노예가 된 시간 속에서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이 변혁 불가능성과 맞서 싸워온 프리모 레비의 40년, 그 고독의 정점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한 자 한 자가 새겨졌을 것입니다.

 

감히 짐작하지 않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마음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죽음을. 오직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의 마지막 매듭으로 삼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여기 이 자리, 우리 삶의 마지막 터로 삼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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