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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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8월, 아우슈비츠는 아주 무더웠다.·······갈증은 배고픔보다 더 시급한 문제이다.·······갈증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배고픔은 기진맥진하게 만들지만 갈증은 광폭하게 만든다.·······

  카포가 잡동사니들을 치우도록 내게 할당한 곳은 창고의 구석자리였다.······수직의 벽을 따라 2인치짜리 파이프가 있었는데·······수도꼭지가 붙어 있었다. 수도관인가?·······나는 혼자였고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돌을 망치 삼아 수도꼭지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수도곡지에서 물방울이 흘러나왔다.·······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 물을 당장에 몽땅 마셔버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니면 내일을 위해 좀 남겨둘 수도 있었다. 또 알베르토와 절반씩 나눌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작업반의 모든 동료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나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다니엘레는 뭔가 의심했고, 결국 짐작했다.·······해방 뒤·······다니엘레는 굳은 목소리로 내게 그 일에 대해 말했다. 왜 너희들은 되고 나는 안 되지? 그것은 다시 떠오른 ‘일반인의’ 도덕률이었다. 오늘날 자유로운 인간인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잔인한 카포가 내리는 끔찍한 사형선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뒤늦은 수치심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없을까? 그 당시에도 나는 답하지 못했고 지금도 답하지 못하고 있지만, 수치심은 있었고 여전히 있다. 구체적이고, 무겁고, 영구적인 수치심 말이다. 다니엘레는 이제 죽고 없다. 그러나 우애 있고 애정 어린 우리 생환자 모임에서 하지 못한 그 행동, 나누지 못한 물 한 컵의 장막은 ‘큰 대가’를 요구하며 우리 사이에 투명하게 놓여 있었다.(92-95쪽)

 

프리모 레비를 읽은 뒤부터 제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실존적인 각성과 질문은 다름 아닌 죽음과 자살 문제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30cm 이내 거리에 있다.”

 

“무엇이면 스스로 목숨 거두는 선택을 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순간마다 프리모 레비를 더욱 사무치게 생각합니다. 그가 처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순간들, 그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 그 무엇보다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마침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섰을 때 명멸했을 상념들을 헤아려보면서 매번 지침 없는 눈물을 쏟습니다. 제 삶이 정화되는 시간들입니다.

 

프리모 레비로 말미암은 시간들 가운데 지금 이 부분은 참으로 아프고 쓰라린 것입니다.

 

다니엘레는 이제 죽고 없다.

 

이 문장을 써놓고 프리모 레비는 한참을 울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어 절창이랄 밖에 없는 이 말이 폐부를 찌르며 달려듭니다.

 

물 한 컵의 장막

 

그래, 그렇구나, 물 한 컵이 장막이 되어 생사를 갈랐구나, 그러나 그 장막이 너무나 투명하여 죽음이 다시없이 선명하게 보이는구나, 바로 이게 치러야 할 ‘큰 대가’로구나·······문득 프리모 레비의 폭포 같은 죽음 한 줄기가 설핏 그 진실을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물 한 컵으로 알베르토와 다니엘레 사이는 하늘과 땅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니엘레의 질문은 천하의 준엄함으로 다가옵니다.

 

왜 너희들은 되고 나는 안 되지?

 

프리모 레비에게 “구체적이고, 무겁고, 영구적인 수치심”을 안긴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시각각 던져집니다. 저 “너희들”과 “”를 구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리뷰24에서 패거리 문제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권력이 선두에서서 조장하는 패거리가 만연한 우리사회에서 이 질문은 매우 결정적crucial인 것입니다.

 

일천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매판적인 “통일신라 패거리”와 자주적인 의로운 사람들의 연대가 맞서온 과정이 우리 역사의 근간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구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통일신라 패거리”는 이 나라의 주류임을 자처하며 여전히 매판적 협잡을 통해 권력과 부를 독점한 채 의로운 사람들을 분할통치술로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의로운 사람들은 누구까지 생명의 연대에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프리모 레비처럼 그들에게는 “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은 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인색과 물색없는 오지랖 사이지만 상대방의 처지에서는 선택과 유기 사이여서 더욱 어렵습니다.

 

한의원 털리고 낭인으로 떠돌던 시절, 우리사회의 어둠이 내린 여러 곳 사람들과 아주 적으나마 함께하였습니다. 강정마을, 평택 쌍차, 명동 마리·······해직 언론인, 희망버스 기획자·······함께하지 못한 사람이 물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습니다. 제 의료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침, 한약, 심리 상담이 대부분 무료로 이루어졌지만 상황에 따라 한약은 비록 원가 수준이었으나 돈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저 또한 “1리터쯤, 어쩌면 그것에도 못 미칠 것 같”은 ‘물’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밀려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정반대의 죄책감과 수치심도 있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지아비로서 기본적인 돈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한약과 침을 싸들고 제주도로 날아가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대체 한의원은 어찌 하고 저렇게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니는지 알 길 없는 어린 딸은 또 무슨 생각을 할까?

 

누구도 매 순간 저 죄책감·수치심과 이 죄책감·수치심의 경계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해도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죄책감과 수치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필요한 염치廉恥이기 때문입니다. 치러야 할 ‘큰 대가’는 각자 깜냥에 맞는 몫이 있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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