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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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연대감의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자책 또는 비난은 더욱 현실적이다.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고 빼앗고 구타한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 생존자들은 소수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카포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다) 그 기억을 지운다. 그에 반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나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힌다.(91쪽)

 

어느 순간 우리사회 전역에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홀연히 떠올라 이제는 요지부동의 진실로 자리 잡았습니다. 의로운,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죄와 벌의 차꼬가 채워집니다. 불의한, 그래서 부유한 자들에게는 승승장구 대박 나는 탄탄대로가 열리고 있습니다. 급기야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아니 저질러야 헌법기관, 심지어 대통령도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야훼와 붓다를 제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천박하게 너무나 참담하게 겪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매판과두정치買辦寡頭政治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지점에서 아우슈비츠와 대한민국은 다르지 않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다만 외적 현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 그 감정과 이성, 그리고 의지의 결을 따라 들어가 마음 실재를 포착해냅니다. 의도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그 범죄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자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 희희낙락 살아간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나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의로움의 감수성을 파고든다는 진실에 영혼의 촉수가 닿아 있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자책감과 수치심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자기의 악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은 자기의 선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늘 덜 누린다고 앙앙불락하고 의로운 사람은 늘 더 누린다고 자책합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하고 의인은 자기 손의 것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의롭지 못한 자는 음모란 없다고 떠들며 늘 음모를 꾸밉니다. 의로운 사람은 음모에 당하면서도 늘 음모란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인간답지 못한 현실 세상에서는 의롭지 못한 자가 백전백승합니다. 백전백패하는 의로운 사람이 끝까지 버리지 않은 꿈은 인간다운 실재 세계입니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 문제가 연일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관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기억을 지운다”며 나대고 있습니다. ‘찌라시’에 흔들리는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찌라시’ 흘리는 정치를 하는 집단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진돗개가 청와대 실세라는 ‘농담’은 다만 농담이 아닙니다. 그 ‘농담’은 무심코 진돗개가 제압하고 있는 ‘똥개’를 은유로 깔아 놓았습니다. 의롭지 못한 자의 전형을 이루기 위해 총궐기한 저들의 모습은 가증스럽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자아내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죄책감도 수치심도 사라진 저들의 영혼은 초월적 권위의 망령에 사로잡혀demon possessed 있습니다.

 

정치적 귀신들림political demon possession은 이 땅을 나치와 같이 칠흑의 광기로 덮어가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을 물을 따름입니다. 돈이 모든 광기의 출발이자 귀결입니다. 돈을 위해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덮기 위해 사람을 죽입니다. 살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더욱 깊이 귀신들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사악하고 음산한 시대를 꿰뚫는 힘, 그러니까 참된 정치적 영성은 무엇일까요? 의로워서 가난해진 사람들이 지닌 따스한 죄책감과 수치심, 그러니까 염치가 빚어내는 날카로운 느낌과 맑은 알아차림, 그리고 옹골찬 손잡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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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12-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대, 사회적 연대가 절실한 시점인데 정치적 무력감이 널리 퍼지는 것 같습니다.

bari_che 2014-12-10 09:23   좋아요 0 | URL
걱정입니다.
외곽을 때려 중심을 무너뜨리는,
다른 형태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