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데, 무슨 죄인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리가 휩쓸려 들어가 있던 체제에 대항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아니면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떠올랐다.·······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너도 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다.·······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생환자는 스스로를 피고로, 심판받는 사람으로 느끼며 자신을 해명하고 방어해야 할 것처럼 느끼게 된다.(89-91쪽)

 

“내가 그랬다, 내가 내 아들을 죽였다(I did it, I killed my son.)”

 

나이트클럽에 나가 밤일을 하면서 혼자 어렵게 두 아이를 키워오던 한 여인이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TV와 서랍장이 쓰러진 채 나뒹굴고 큰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평소에 아이들을 재워 놓고 나갔다 돌아오곤 했는데 하필 그 날 밤 따라 아이들은 깨어서 함께 서랍을 열고 들어가는 등 놀았고 그 와중에 서랍장이 쓰러지며 그 위에 놓여 있던 TV가 떨어져 큰 아이의 머리를 가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은 서투른 영어로 자기 잘못을 탓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말을 근거로 법원은 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손 씨 성을 가진 한국인 교포였습니다. 이 일은 미국의 잭슨빌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내가 잡았어, 내가 내 새끼를 잡았다고!”

 

그는 분명히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상황이라면 대한민국 어느 엄마라도 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새끼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아니면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에 가슴 치며 절규했을 말이 이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사무치는 죄책감을 단도직입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상황에서 그 여인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 교민과 어느 변호사의 노력 끝에 몇 년 뒤 주지사의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고 합니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그의 마음에는 “스스로를 피고로, 심판받는 사람으로” 여기는 나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기구하고 슬픈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죄인 자의 유죄인 느낌. 체제에 맞서는 대항이든 운명에 맞서는 대항이든 실현 불가능한 자기 의무를 전제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해명하고 방어해야 할 것처럼 느끼는” 의인의 수치심. 이처럼 날카로운 모순, 깊은 감옥이 다시 있을까요. 대항이 곧 죽음이라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도 “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너도 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때문에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아우슈비츠 생환자와 손 여인, 그리고 세월호 엄마들은 이런 점에서 하나입니다.

 

자기 잘못이 아닌 것에 무한한 죄의식을 지니는 사람들. 자기 책임이 아닌 것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 자기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여 당위를 세우고 수행하지 못한 것,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것에 끝없이 마음 쓰는 사람들. 사실 인간세상은 이들의 고통을 통해 공존과 배려의 가치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대박난 자들의 대죄를 대속합니다. 이들이 크리스투스입니다. 이들이 237일 째 단원의 아이들을 품어 안고 황천강을 지키는 바리공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