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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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생활 도중에 자살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나는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 해석들이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다. 즉, 심사숙고한 행위이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충동적이지도 않은 하나의 선택이다. 라거에서는 선택의 기회가 별로 없었고 노예가 된 동물들처럼 살았다.·······둘째,·······늘 코앞에 닥쳐온 죽음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셋째,·······자살은 어떤 형벌도 덜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난·······다.·······포로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고 죄책감은(형벌이 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므로) 해방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제2선으로 밀려나 있었다.(88-89쪽)

 

젊은 사람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을 하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데 우울증은 무슨·······그런 거 비집고 들어올 틈이 어디 있냐? 다 살만하니 그런 소리하는 거야.”

 

우울증에 대한 이런 해석은 프리모 레비의 자살 해석과 같은 맥락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정신장애이므로 말 그대로 ‘정신없는’ 상태라면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살은 인간의 행위이므로 동물 상태라면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이런 해석은 프리모 레비의 자살 해석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삶은 긍정적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동물 같은 삶은 부정적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과연 먹고사느라 정신없는 삶은 긍정적일까요? 그것이 건강함일까요? 아닙니다. 인간다움을 잃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상태는 그럼 어떤 것일까요? 살만하니까 걸리는 부자 병 또는 호강 병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삶, 아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인정과 신뢰를 잃은 병입니다. 그 주된 원인이 바로 아우슈비츠 포로들을 자살로 이끄는 죄책감과 수치심입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생물학적 생명에 손대기 전에 먼저 마음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이렇게 해서 아직 살아 있음과 이미 죽어버림이 공존하는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사회를 강타한 죄책감과 수치심은 본질에서 아우슈비츠 포로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사회가 지금 처한 문제의 심각성과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세계최고의 자살률을 10년째 기록해온 나라의 국가권력이 도리어 국민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을 강요하니 이 땅에 더 이상 자살은 없습니다. 오직 국가권력이 자행하는 타살만 있을 따름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임에도 여전히 인간으로서 한 올의 마음조차 지니지 않은 반인간적 권력에 환호작약하는 무지한 자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 긍정주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그 행태가 알량한 탐욕과 조작된 공포의 소산임을 모른 채 「임꺽정」(이두호)의 김달평처럼 잔혹하게 킬킬거리며들 살고 있습니다. 저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짐승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의 특권층 포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울증도 자살도 공동체 전체의 문제, 그러니까 공공의 어젠다로 인식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깨달음은 준 사건은 너무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 문제에 안일하고 둔감했다는 증거입니다. 먹고살기에, 아니 살아남기에 급급한 삶으로 몰아가는 어둠의 세력을 직시하고 그에 맞서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을 알아차리고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찰나마다 혼신의 힘으로 싸워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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