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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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생환자들의 이야기와 내 기억들로 판단해보건대,·······대부분의 경우 해방의 순간은 기쁘지도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보통은 파괴와 대량학살의 비극적 배경 위로 고통의 종이 울렸다. 다시 인간이 되었음을 느끼는 순간, 다시 말해 책임감을 느낀 그 순간에 인간적 고통이 되살아났다. 흩어진 또는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한 고통, 자신의 주위에 퍼져 있는 보편적인 아픔에 대한 고통, 이미 결정되어버리고 더 이상 치료될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의 기진맥진함에 대한 고통, 잔해더미 한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인생에 대한 고통 말이다. “기쁨은 괴로움의 자식”이 아니다. 괴로움이 괴로움의 자식이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단지 운 좋은 소수나 굉장히 단순한 영혼들에게만 잠시 환희를 가져왔을 뿐, 거의 언제나 불안의 양상과 겹쳐져 있었다.(81-82쪽)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선생님한테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옛날 한 노비가 있었습니다. 종살이가 너무 고통스럽고 지겨워서 몇날 며칠 주인에게 면천시켜 달라고 간청하여 드디어 허락을 받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두 갈래 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었으니 골치 아프게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 판단에 책임질 이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이 두 개로 갈라졌습니다. 산길이 지름길이니 그리로 가야한다는 주장과 들판길이 평탄한 길이니 그리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 것입니다. 나름대로 일리도 있고 무리도 있습니다. 산길은 위험하고 들판길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 해방된 노비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인한테 돌아가기로.

 

선생님은 아이들이 알아들을 것이라고 믿으셨는지 모르지만 그 때 제 기억으로는 매우 어려운 말 한 마디를 던지심으로써 이야기 끝을 맺으셨습니다.

 

“자유를 얻으려면 불안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치밀하게 준비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찾습니다. 물론 준비하는 동안 수없이 엄습해오는 불안을 견뎌내는 자기 치유의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맞은 해방은 환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우슈비츠 포로들은 스스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짐승처럼 살다가 전쟁의 종말과 함께 어지럽고 복잡한 조건 속에서 풀려났습니다. 기쁘지도 홀가분하지도 않았다는 프리모 레비의 담담한 음성이 듣는 자의 가슴을 도리어 후벼 팝니다.

 

다시 인간이 되었음을 느끼는 순간, 다시 말해 책임감을 느낀 그 순간에 인간적 고통이 되살아났다.

 

수용소가 인간의 수용소였다면 고통에서 환희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수용소가 짐승의 수용소였으므로 고통은 다른 고통으로, 그러니까 ‘비인간적 고통에서 인간적 고통으로’ 넘어갈 뿐이었습니다. 인격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었던 상태의 고통에서 인격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상태의 고통으로, 그러니까 더욱 잔혹하고 신랄한 고통으로 옮겨갈 따름이었습니다.

 

인간이기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고통이지만 짐승으로 뒹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인간으로 복귀한 그들에게 “흩어진 또는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한 고통, 자신의 주위에 퍼져 있는 보편적인 아픔에 대한 고통, 이미 결정되어버리고 더 이상 치료될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의 기진맥진함에 대한 고통, 잔해더미 한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인생에 대한 고통”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 아닌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원천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심연입니다. 그 심연에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똬리 틀고 있는 것은 실체가 모호한, 그래서 더욱 무서운 불안입니다. 생명체의 존재론적 불안의 절대값을 제곱하면 나오는 부정不定uncertainty의 불안, 그러니까 무한히 요동치면서 자기복제 되는 제어불능의 불안입니다.

 

제어불능의 불안은 자유와 거래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이 불안의 심연 속에 자유가 익사해버리는 것입니다. 끝내 자유를 내어주지 않는 이 악마적 불안이 실은 광기어린 압제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유혹입니다. 대중을 그 안에 가두기 위해 종종 비행기도 떨어뜨리고 배도 가라앉히며 급기야 돈을 건네주어 적으로 하여금 대포도 쏘게 합니다. 사건의 크기와 그들이 맞은 위기, 그러니까 노리는 이득은 정비례합니다. 세월호사건 뒤에는 바로 이런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잊지 않으리라는 다짐보다 진실을 향해 단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려면 불안의 자기복제 전략에 말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불안의 자기복제 전략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이제 고통의 한가운데서 존엄의 날의 벼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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