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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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층은 그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만큼 외부의 조력자가 더 필요해진다.·······그들을 묶어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범죄의 짐을 지게 하는 것이고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며 가능한 한 그들을 연루시키는 것이다.(46쪽)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더 확산된다·······. 이 회색지대의 구성원들은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 강화하려는 의지로 서로 결속했다.(48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는 많은 순간 그가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서 쓰지 않았나 하는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그의 통찰이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임과 동시에 한국사회가 그만큼 수용소적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사회가 움직이는 시간적 맥락과 공간적 지평을 잘 살펴보면 노골적인 패거리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패거리 짓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인간의 본성이려니와, 그런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경우 염치를 몽땅 말아먹은 뻔뻔함으로 대놓고 패거리 판을 짜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TV드라마를 보면 그 이야기 속에는 거의 빠짐없이 연기자가 등장합니다. 연기자가 연기자를 연기하는 구도를 유심히 보면 그게 바로 패거리 짓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복제를 통한 무한증식 버전의 패거리 짓기인 셈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패거리 짓기의 진수는 예능 프로입니다. 여러 갈래의 예능 프로가 있지만 패거리 짓기는 그 다양성의 행간에서 비교적 단순한 동선을 따라갑니다. 패거리적인 친분을 과시하며 패거리적인 서사를 만들어냄으로써 패거리적인 재미를 대중에게 널리 퍼뜨려 패거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연기자를 포함한 각종 대중적 인기 직업인,  심지어 방송을 통해 ‘뜬’ 전문직종의 스타들까지 패거리적인 인연을 통해 출연해 명예와 부를 독점해갑니다. 최근 들어 눈에 띄는 현상은 그들의 가족과 친지가 대거 등장한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걷기조차 못하는 어린 아들·딸에서 늙은 시어머니·장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들의 애완동물들까지.

 

프로그램 구상에서 이익 분배까지의 전 과정에 공공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사적 영역에서 사적 채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누구누구 사단’이 무수히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 강화하려는 의지로 서로 결속”하는 횡적인 패거리 짓기의 전형입니다.

 

대체 이런 현상은 어디서 연유했을까요? 당연히 권력 집단의 패거리 짓기입니다. 폭이 좁은 권력층은 외부 조력자, 특권층 포로 집단을 “범죄의 짐을 지게 하는 것·······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 가능한 한 그들을 연루시키는 것”을 통해 상하관계의 결속, 그러니까 종적 패거리 짓기를 함으로써 억압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지요.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더 확산”되는 이치를 따라 사회 모든 영역에 이런 횡적 패거리 짓기가 미만彌滿해집니다.

 

조선의 식민화를 주도한 서인 노론의 적자 집단과 식민지 시대 새로이 형성된 적극적 부역 집단이 야합하여 만들어낸 현대 한국의 주류적 통치세력은 기원에서나 정당성에서나 모두 협소한 기반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치밀한 음모와 현란한 술수를 동원하여 다양한 특권층 포로 집단을 양성했습니다. 그들을 범죄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영원한 포로로 묶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연루된 포로들은 그 알량한 특권을 지키기 위해 결속하고 또 결속하며 광대한 마름들의 바다를 만들었습니다. 그 바다가 사람 삼킨 날이 어찌 2014년 4월 16일뿐일 것입니까. 그 바다가 삼킨 사람이 어찌 304명뿐일 것입니까.

 

종횡무진, 패거리의 패거리에 의한 패거리를 위한 세상. 압제자들이 꿈꾸어온 천년왕국입니다. 공포와 탐욕과 무지로 똘똘 뭉친 이 패거리 판을 깨뜨리기 위하여 손을 맞잡은 곡속불망觳觫不忘의 공동체로 우리는 우리의 꿈을 꾸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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