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권층 포로들을 보자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또한 더 중요해지는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또는 유사한 시련이 다시 닥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을 방어하고 싶다면,·······이 인물들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권층 포로는 라거의 전체 인구에서 소수였지만 생존자들 가운데서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말로 한 이야기든 글로 쓴 것이든 생환자들의 기억들 중 대부분이 이렇게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즉, 수용소의 현실에 맞닥뜨린 최초의 충격은 예견하지 못하고 이해도 할 수 없었던 누군가의 공격이었는데, 관리자 포로라는 새롭고 이상한 적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자신은 잃어버렸지만 상대는 아마도 아직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을 존엄의 불씨를 꺼뜨리고자 했다.

  라거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에서 특권층의 부상은 걱정스럽지만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권층은 유토피아에서만 없다. 모든 부당한 특권에 대항해 전쟁을 하는 것은 의로운 인간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수 또는 한 사람이 다수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곳에서 특권은 태어나고, 권력 자체의 의지에 반하면서도 특권은 증식한다. 그러나 한편, 권력이 특권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동시에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인과 하인의 두 영역을 나누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판단 욕구를 혼란시키기에 충분한 것을 그 안에 품고 있다.(44-46쪽)

 

황석영의 「장길산」에는 최형기라는 특권층 포로가 등장합니다. 양반 권력자의 마름 노릇을 하는 중인中人, 그러니까 혼성 계층 인물입니다. 양반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야비한 언행으로 양반권력을 유지·온존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개짓꺼리를 합니다. 그의 폭력은

 

자신은 잃어버렸지만 상대는 아마도 아직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을 존엄의 불씨를 꺼뜨리고자

 

저지르는 추악한 범죄입니다. 인간이려면 최후까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중요한 단서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자신은 잃어버렸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존엄을 이미 잃어버린, 인간성을 상실한, 형해화한 인간입니다. 인간의 외형이 남아 있는 두억시니夜叉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멸망해가는 양반 나라의 회색지대에 서 있는 양반의 개이면서 양반의 멸절을 재촉하는 존재인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은 불치병에 걸려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병든 영혼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히 트릭스터trickster 구실을 하였을 것입니다. 신화나 민담에 등장하는 트릭스터는 선과 악, 파괴와 생산, 현자와 바보 같은 완전히 다른 대칭성을 갖춘 회색 존재입니다. 트릭스터는 그 대칭성을 가로질러 기존 질서와 체제를 비틀고 흔들며 뒤바꾸는 매개자입니다.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이렇게 건전하지 않은 회색 존재들이 불온을 사회 전반에 번지게 해야 합니다. 최형기는 불온을 번지게 하는 트릭스터가 아니라 자신의 병을 민중에게 감염시켜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관리자 포로였습니다.

 

신화나 민담에 트릭스터가 보편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 역사에서 그런 존재에 대한 갈증이 극심하다는 뜻일는지도 모릅니다. 지구가 거대한 수용소로 전락해가고 있는 오늘 인류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잔혹한 세월호로 침몰해가고 있는 여기 우리에게, 어쩌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트릭스터들일는지도 모릅니다. 엄정하게 생각할 때, “모든 부당한 특권에 대항해 끝이 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의로운 인간”도 사실은 이 트릭스터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신화나 민담에 나오는 영웅처럼 지나치게(!) 순도 높은 의인은, 현실 세계에서는, 이미 죽임을 당했거나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민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겪은 극단적인 죽음의 수용소는 변화가 원천 봉쇄된 세계입니다. 거기의 관리자 포로는 당최 트릭스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일으키는 불안감은 “존엄의 불씨를 꺼뜨리고자” 퍼뜨리는 바이러스입니다. 그들이 서식하는 회색지대는 포로들한테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판단 욕구를 혼란시키기에 충분한 것을 그 안에 품고 있”을 뿐 압제자들한테는 지극히 간결하고 투명한 공간입니다. 거기 서식하는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아무리 어지러이 날뛰어봐야 양 무리를 collecting하고 driving하는 목양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는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나타난 세계는 어김없이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금-여기입니다. 아무리 본질적으로 같다 해도 그대로 아우슈비츠는 아닌 지금-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글 첫머리로 돌아가겠습니다.

 

특권층 포로들을 보자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또한 더 중요해지는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또는 유사한 시련이 다시 닥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을 방어하고 싶다면,·······이 인물들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문단에서 특권층 포로 대신 트릭스터를 넣어 생각해보면 결곡한 길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의인을 자처하지 말고 불온한 트릭스터가 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