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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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소한 수용소에서 목격한 놀라운 광경은·······충격을 던져주었다.·······적은 주변에도 있었지만 내부에도 있었다. “우리”라는 말은 그 경계를 잃었고, 대립하는 자들이 두 편으로 나뉜 게 아니었다. 하나의 경계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복잡한 경계선들, 곧 우리들 각자 사이에 하나씩 놓인 수많은 경계선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적어도 불행을 함께하는 동료들의 연대감을 기대하면서 수용소에 입소했지만·······바라던 동맹은 없었다. 반면에 수천 개의 봉인된 단자單子들만이 있을 뿐이었고 이 단자들 사이에는 필사적이고 은밀하고 지속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수용소에 수감된 처음 몇 시간 만에 종종 미래의 동맹군이라 기대되었던 사람들 쪽에서 퍼붓는 집중 공격의 즉각적인 형태로·······나타났다. 이는 저항할 능력을 단박에 무너뜨릴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치명적이었다.

  ·······수용소 세계는 그 기원·······에서부터 상대의 저항 능력을 분쇄하려는 주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SS 군은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주 얼굴에 가해지던 즉각적인 주먹질과 발길질,·······입소자들을 완전히 벌거숭이로 만드는 것, 털이란 털은 모조리 깎는 것, 누더기를 입히는 것 등.·······수용소 입소 시에 수반되었던 모든 불길한 의식들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연출이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명백한.

  그럼에도 입소의식과 그것이 촉발시킨 도덕의 붕괴에는 수용소 세계의 다른 구성원들 역시 거의 의식적으로 기여했다.·······포로들 말이다. 새로 온 사람을 친구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행의 동반자로 맞아주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41-42쪽)

 

글의 흐름을 보면, 먼저 수용소에서 포로 사이에 일어나는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폭력이 수용소 메커니즘 자체, 그러니까 SS 군의 의도와 연출에서 시작되었다는 고찰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그 폭력이 피해자의 의식적 기여로 말미암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합작품임을 밝힙니다. 아마도 프리모 레비는 권력과 타협하여 형성되는 피해자의 자발적 폭력 스펙트럼을 냉정하게 그려낼 요량으로 이 <회색지대>라는 장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역접의 접속어 ‘그럼에도’를 배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수긍할만합니다.

 

그야말로, 그럼에도, 좀 더 면밀히 이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의자醫者인 제 견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피해자들의 이런 마음 작용을 타협이나 의식적 기여라고 말하는 것은 이성적인, 그러니까 정상적인 명료함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구태여 학문으로 엮는다면 사회인문학의 언어입니다. 의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전혀 달라집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후자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포로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나치가 가한 폭력은 돌이킬 수 없는 외상trauma이며, 그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태들은 일련의 외상후증후군이라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폭력의 외상을 입은 피해자가 병적인 상태에서 폭력을 향해 마음을 작동시킨 것은 가해자의 폭력성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내면화를 좀 더 선명하게 표현하면 ‘감염’입니다. 상처 입은 포로들이 주고받는 폭력성은 감염의 확산입니다.

 

감기나 간염 같은 몸의 병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이런 경우를 감염이라 할 수 있는가, 싶지만 상식과 달리 마음의 병도 감염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입니다. 흔히 모방 자살이라 합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감염된 마음상태에 이끌려 죽음의 길로 속절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폭력성을 직접 경험한 포로들에게 모방 폭력이라는 표현은 더욱 부당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타협이나 기여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단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관통상을 입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를 제 논지에 의거, 의학어법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그럼에 따라’가 적절할 것입니다. 나치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폭력성이 자연적 인과의 경로를 따라 포로들에게 감염되고 확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면 나치와 타협하고 그들의 범죄에 기여한 것을 고발하기 위한 판단의 언어보다는 치유를 위한 진단의 언어가 적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 와야 비로소 저 압제자들의 차가운 음모를 따스함으로 분쇄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 전체주의 지배집단의 의도와 연출로 자행된 폭력 또한 피해자들 사이에 극심한 감염 상태를 야기했습니다. 허울뿐인데도 민주공화국의 국민이라 하니 포로인 줄 모르고 날뛰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 도리어 큰 슬픔을 자아냅니다. 더군다나 ‘어디 출신’이라는 단 하나의 허구적 근거에 입각하여 자신들을 로열패밀리로 착각하는 찌질한 무리가 막무가내로 저지르는 폭력은 그 자체로 블랙코미디입니다. 이른바 ‘일베’ 아이들이 세월호 유족에게 하는 짓은 존더코만도스의 악행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병식病識 없는 저 병자들을 의자의 눈으로 보면 더 측은하거니와 치료의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더더욱 절망적입니다. 225일 째 4월 16일 오후, 포로 주제에 나라 걱정이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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