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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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해하다’의 의미는 ‘단순화시키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심오한 단순화 과정이 없었다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정의할 수 없고 끝도 없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방향설정 능력과 행동결정 능력을 위협할 것이다. 요컨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식 가능한 것들을 도식적으로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낸, 언어나 개념적 사고와 같은 인간 고유의 놀라운 도구들은 모두 이러한 목적에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역사도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우리 안에는 ‘우리’와 ‘그들’로 영역을 나누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해서·······‘친구-적’이라는 이분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인간 세계의 넘쳐흐르는 사건들을 갈등으로, 갈등은·······대결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거의 무의식적으로·······승자와 패자를 원했던 것이며, 승자를 선한 자, 패자를 악한 자와 동일시했던 것이다. 이겨야 하는 쪽은 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뒤집힐 것이다.(39-40쪽)

 

夫無不可以無明. 必因於有. 故常於有物之極而必明其所由之宗也.

 

무릇 무한은 무한 (자체로) 밝힐 수 없다. 반드시 유한에서 말미암아야 한다. 그러므로 늘 유한한 사물의 극(점)에서 그들이 연유한 근원을 밝혀야 한다.

 

 

오래 전 도올檮杌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한 구절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미상불 왕필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의 요지와 여기 프리모 레비의 ‘심오한 단순화’는 같은 맥락에 놓일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 자체가 그렇고 언어를 매개로 한 사유의 근간인 환유와 은유가 그러합니다. 단순화이자 유한한 사물의 극(점)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화는 심오해야 합니다. 유한한 사물은 극점에 다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완결적 최종성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여서 얻은 곡진하고 결곡한 유한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작으로 열려 있는 마지막 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재를 얻기 위한 23시 59분 59초의 현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진실에 터하여, 그 터함을 전제하고, 프리모 레비가 말한바 ‘그렇지 않으면 뒤집힐 세상’에서라면, 그러니까 악한 자가 이기고 선한 자가 지는 세상이라면, 심오한 단순화와 유한한 사물의 극(점)을 극진한 마음으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대립각을 분명히 세우고 전선을 형성해야만 합니다. 그 전선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기려면 단순화된 극(점)에 무한히 접혀 있는 단순하지 않은 결들을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그 복잡한 회색 스펙트럼의 결들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갈리는 승패가 결국 풍요로운 진실의 세계를 여느냐, 마느냐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회색 스펙트럼의 결들은 세계의 복잡하고 불투명한 실상을 어지럽게 드러내줍니다. 이것에 말려들어는 안 됩니다. 이것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힘과 정보를 쥐고 있는 압제자들은 영악하게 이 스펙트럼의 명암과 채도를 조종하여 폭력을 구사합니다. 모으고 흩고 줄 세워 정신없이 전선에 휘말리게 합니다. 극단의 대결을 벌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끼리 물고 뜯게 합니다. 극단의 대결을 벌여야 할 사람들끼리 야합하게 합니다.

 

지금-여기는 어떤 전선이 형성되어 있을까요. 저들은 세월호 참사를 ‘사고’라고 규정하여 ‘보상’을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여태까지 내밀었던 오리발의 연장선입니다. 책임은 없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시혜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고’의 맞은편에 ‘사건’이 있습니다. ‘보상’의 맞은편에 ‘배상’이 있습니다. 대립각은 날카롭습니다. 진실을 탈환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단순한 극(점)에서 칼을 빼어들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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