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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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런 기억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아예 기억의 진입을 저지하는 것, 즉, 경계를 따라 방역선防疫線을 치는 것이다. 기억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억이 기록된 뒤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추악한 작업을 담당한 사람들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보호하고, 가장 무감각하고 극악무도한 자들조차 꺼림칙해 할 그들의 작업이 확실히 수행될 수 있도록 나치 사령부가 고안해낸 방책들 중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목적에 사용된 것이었다. 러시아 전선의 후방에서 민간인들을 공동구덩이(희생자 자신들이 직접 파야 했다) 가장자리에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쏜 아인자츠코만도스Einsatzkommandos에게는 원하는 대로 술이 무한정 배급되었다.(33쪽)

 

曰若寡人者 可以保民乎哉 曰可 曰何由 知吾可也 曰臣聞之胡齕 曰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 曰牛何之 對曰 將以釁鐘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廢釁鐘與 曰何可廢也 以羊易之 不識 有諸 曰有之 曰是心 足以王矣 百姓皆以王爲愛也 臣固知王之不忍也 王曰然誠有百姓者 齊國雖褊小 吾何愛一牛 卽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故以羊易之也 曰王無異於百姓之以王爲愛也 以小易大 彼惡知之 王若隱其無罪而就死地則 牛羊何擇焉 王笑曰 是誠何心哉 我非愛其財而易之以羊也 宜乎百姓之謂我愛也 曰無傷也 是乃仁術也 見牛未見羊也 君子之於禽獸也 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 是以君子遠庖廚也

 

(제 선왕이) 묻습니다. “저도 백성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능합니다." 왕이 묻습니다. “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십니다. “신은 호흘胡齕이라는 왕의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양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이 대답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이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 하였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 왕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께서 말씀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주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맹자」<곡속장觳觫章> 일부입니다. 제나라 선왕이 흔종 의식에 쓰기 위해 죽을 곳으로 끌려가며 무서워 벌벌 떠는 소를 차마 보지 못하고 풀어주라 명합니다.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한 양으로 대신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맹자가 그 왕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무서워 벌벌 떠는 소가 눈에 들어왔을 때 불인지심不忍之心을 낸 것에서 백성을 향한 어진 마음의 단초를 읽어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저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에까지 관심을 기울인다면 패도 아닌 왕도를 널리 펼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나치가 간 길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자신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직접 파도록 하고 희생자를 그 구덩이 가에 세운 다음 술에 만취된, 그러니까 불인지심不忍之心은커녕 기억의 진입조차 저지된 상태의 용역들을 시켜 사살하는 추악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패악이 수없이 자행되는 동안 히틀러를 포함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아예 자기 눈으로 보지 않도록 철저히 겹겹이 에워싸서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사전에 차단하였습니다. 술이 아니어도 이미 그들에게는 기억 형성 자체가 원천 봉쇄된 만큼 일말의 죄책감도 있을 리 없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그렇게 치밀하게 그 메커니즘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어떠합니까?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살려 달라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도 구경만 했습니다. 새끼들 제발 살려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을 보고도 외면했습니다. 왜 죽었는지 진실을 밝혀 달라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도 조롱했습니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임에랴. 아니, 전 국민한테는 고문하듯 진종일, 몇날며칠을 보여주고 정작 보아야 할 자들은 일부러 딴 짓 하면서 보지 않았을 테니 당최 불인지심不忍之心을 일으켰을 리 없다, 그러니까 기억의 진입 자체를 저지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보지 않아 없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을 보이지 않는 데까지 확장한다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저들이 어찌 국민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요. 그런 저들이 어찌 국민을 주권자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춘추전국시대만도 못한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소 같은 대접이라도 받기를 기대하는 것마저 얼마나 물색없는 꿈인 것인지. 소만도 못 한 우리야말로 기억이 천명 아닐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잊지 못하리觳觫不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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