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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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받은 사람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기억을 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희생자는 고통 속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다시 한 번 그 상처는 치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장 아메리·······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한·······그가 남긴 글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린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에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 철저하게 그를 무無로 만들어버린 데서 오는 혐오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는 첫 따귀로 이미 금이 가고, 이어지는 고문으 로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그에게 고문은 끝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아메리, 그는 1978년에 자살했다.(24-25쪽)

 

아메리, 그는 1978년 자살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이 문장을 쓴 프리모 레비도 1987년, 결국, 자살했습니다. 여기로 생각이 흐르자 눈물은 이내 강이 됩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질문 하나 떠오릅니다.

 

이들의 죽음이 어째서 ‘자살’이란 말인가?

 

치유 불가능하다,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더 이상 회복되지 않는다, ‘마침내’ 끝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로 이어지는 이 도저한 참혹의 행렬 뒤에 무심히 나타난 자살했다는 말은 얼마나 낯선 것이고 또 얼마나 긴 숨을 내쉬게 하는 것입니까. 끝나지 않는 죽음에 닿아 있는 죽음은 어떻게 세상의 모든 말을 한 순간에 췌사贅辭로 만들어버립니까.

 

이 먹먹한 가슴으로 더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으려나봅니다. 저 참혹한 언어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새끼들 뒤를 따라 한사코 맹골수도에 뛰어들고만 싶을 어미 아비의 한 뿐입니다. 무슨 말을 보태도 부박할 터이므로 삼가 침묵으로 예를 표함이 도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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