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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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세계는 어디까지 사멸했으며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어디까지 되돌아왔거나 되돌아오고 있는가. 위협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적어도 이러한 위협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21쪽)

 

피할 수 도 없고 침묵할 수도 없는 질문. 서문의 뒷자리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이 질문을 그대로 결론의 맨 뒷자리로 가져다 놓으면 어떨까요. 인간이고자 하는 자들의 가슴을 영원히 두드려대지 않을까요.

 

수용소라는 이름은 매우 고지식하고 어수룩합니다. 현대세계는 이제 이런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보육·교육·학문·오락·예술·스포츠·산업·의료·종교 등 모든 사회 영역과 그 활동이 다양한 갈래의 수용소 시스템으로 환원되고 있습니다. 가정·학교·기업·병원·교회라는 낯익은 이름으로 자발적 수용을 유도합니다. 이들의 컨트롤타워가 국가입니다. 국가는 수용소의 가장 기만적인 별명, 아니 본명입니다.

 

수용소 시스템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더 광폭으로 진화합니다. 여기서 수용소는 더 이상 스톡stock 개념이 아닙니다. 플로flow 개념입니다. 진지전이 아닙니다. 기동전입니다. 공간성spatiality 차원이 아닙니다. 공시성synchronicity 차원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초국적 제약회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프로작이란 약물로 전세계 우울증 환자 4천만 명을 동시에 노예로 수용하는 글로벌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자본과 신자유주의 이념이 야합해서 일구어낸 이 폭력적 약물문명은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세계를 신노예제 사회로 급격히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지구의 새로운 이름은 이제 라티푼디움입니다.

 

우리사회도 교묘하고 기만적인 이름과 형태의 다양한 수용소로 이미 뒤덮여 있습니다. 세월호는 그 가운데 하나일 따름입니다. 핵발전소는 더 무서운 수용소입니다. 자국 군대의 전시작전권을 타국에게 자진 양도하고 되찾지 않으려 꽁무니를 빼는 지구상의 유일한 가짜 독립 국가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수용소입니다. 이 수용소를 굴리고 있는 매판집단은 나치보다 더 살 떨리는 무리입니다.

 

우리,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포(불안)와 탐욕, 그리고 무지(어리석음)의 덫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이 시급합니다. 진실을 세우기 위해(慧) 공포를 뚫고(定) 함께하는(聯) 일이 발본의 전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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