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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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 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의심할 여지없이, 끔찍한 진실에 대한 책임이 있기(또는 있었기) 때문에 그 진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침묵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악행을 알고 있었던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특히 전쟁 마지막 몇 해 동안 라거들은 복합적이고 확장된, 지역사회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체계를 구축했다.·······실제로 그곳은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공산품 기업과 농산품 회사, 군수공장들이 수용소가 공급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으로부터 이윤을 뽑아갔다.(14-15쪽)

 

통이지지痛而知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픔으로써 이르게 되는 어떤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에게서 우리가 ‘고요히’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는 붓다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지만, 아무도 그에게 종교적 흠숭지례欽崇之禮를 표하지 않지만, 그의 깨달음은 가히 성인 반열입니다. 이 길지 않은 인용문에는 인간이 지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 죄업의 근원이 죄다 담겨져 있습니다.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 그리고 이윤. 이윤은 곧 탐욕입니다. 이게 바로 삼독三毒입니다. (통속 불교는 두려움 대신 성냄, 그러니까 진瞋을 넣어 삼독이라 하지만 이는 붓다의 원음이 아닙니다. 통찰이 모자란 후대後代의 생각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지닐 수밖에 없는 무지, 공포(불안), 탐욕을 공적으로 조절하여 공동체 구성원의 공존과 번영을 꾀하는 것이 정치이며 이를 위해 권력을 특정 집단에게 위임하는 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국가 개념입니다. 이 상식적 합의를 깨고 자기 국민을 삼독에 중독되게 하여 제노사이드의 공범으로 만듦으로써 광범위하게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나치의 치밀한 전략이었습니다.

 

많은 독일 국민들은 나치의 범죄에 작위·부작위로 가담하였습니다. 구태여 ‘의도적인무지와 두려움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지와 두려움은 수동적·소극적 인지·정서 상태라는 일반적 이해를 뒤집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아우슈비츠와 관련한 무지와 두려움의 진실은 탐욕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크고 작은 공산품 기업과 농산품 회사, 군수공장들이 수용소가 공급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으로부터 이윤을 뽑아갔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카펫이나 옷을 만들어 팔아서 돈을 벌었습니다. 또 떤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그 카펫이나 옷을 사고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마냥 수동적·소극적 인지·정서 상태로 판단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국민은 침묵했습니다. 그들의 침묵으로 진실은 은폐되었습니다. 아마도 더 이상 세워낼 진실은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이것이 인간, 인간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프리모 레비가 40년에 걸쳐 애써 걷어내려 한 현실이라는 막이었습니다.

 

 

독가스 때문에 탈색된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모발. 카펫과 옷 원료로 쓰였다고 함.  

 

우리사회 또한 독일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할 때 적극적·능동적으로 가담하여 탐욕을 채운 무리가 있습니다. 식민지 상태가 35년 동안 진행되고 있을 때도 역시 적극적·능동적으로 일제에 부역하여 탐욕을 채운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동족을 ‘정신대’로, 731부대로, 탄광으로, 전쟁터로 내모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른바 광복이 되고난 뒤에도 일제를 대신한 점령 세력인 미군정의 비호 아래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 자손들 역시 매판의 정치를 계승하여 역사를 비틀어가며 지금도 권력의 중심에서 당당 무쌍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의 개가 되어 자기 민족을 착취한 이 집단이 나치와 그 부역자 집단인 독일인보다 훨씬 더 잔학함에도 뉘우침은커녕 도리어 애국의 개념은 물론 심지어 영웅과 신의 이미지까지 전유하며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지평에서 저들이 일으킨 대담한 폭력적·수탈적 토건사업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월호의 단원고 아이들은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초월적 권위에서 미친개까지 일제히 거짓말과 조롱으로 일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몰아 죽임으로써 돌아올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위해 저들은 전방위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저들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재난 시스템에 구멍이 ‘난’ 것이 아니라 토건적인 유능함으로 구멍을 ‘낸’ 것입니다. 의도된 무지와 두려움, 그리고 이윤을 철저하게 계산한 프로젝트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여기에서 대한민국 국민, 평범한 그대와 나는 대체 누구입니까. 프리모 레비가 독일 국민에게 추궁하고 있는 비겁함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우리는 과연 세월호 사건의 진실에서 무엇을 왜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의도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돌아올 알량한 이윤, 우리가 충족시킬 탐욕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독일 국민한테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프리모 레비가 준엄한 질문을 하고 있지만 우리한테는 같은 민족 내 백성이 더욱 준엄한 질문을 해올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부끄러움으로 결코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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