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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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관심은 거대한 억압기구의 각 층위에서 어쩔 수 없이 죄에 가담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단죄하는 일이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체제 자체의 범죄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갈라낼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억압기구의 범죄에 의해 가담자나 공범자가 되어버리는 메커니즘에 주의를 기울였다.(278쪽)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프랑스 대학 입학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 2013년도에 출제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주화운동의 핵심이 대학생이었음에도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주제넘게 정치에 참견하느냐?’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하니 하물며 고등학생에게 이 무슨 망발일 것입니까.

 

정치라는 용어가 선두에, 표면에 떠 있지만 이 문제를 찬찬히 뜯어보면 내면에 ‘사회 전체의 메커니즘과 분리된 개인 윤리가 가능한가?’ 라는 철학적 질문이 고갱이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전체와 개체의 비대칭적 대칭성에 관한 근원적 질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만 보면 나타나는 알레르기 반응은 그대로 우리사회가 일극으로 쏠려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라는 진실을 숨기고 모든 문제를 개인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프로파간다가 일관되게 먹히는 사회라는 이야기입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자들은 당연히 분할통치술을 씁니다. 흑백 대결로 간결하게 전선을 정리한 뒤 서로 물고 뜯게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그중 한편은 자신들의 충견입니다. 검찰·경찰과 같은 공적 집단은 물론 자유총연맹·재향군인회 등 준 공적 집단과 어버이연합·일베·용역 따위의 사적 집단들이 전방위적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이 집단에 속한 자들은 반공이라는 독선적·기만적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종북)로 몰아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자들이 공포·탐욕·무지를 적절히 이용해 자신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체, 범죄에 가담·방조하고 있습니다.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 이렇게 작동되는 사이 대부분의 회색 ‘소시민’은 살아남기 위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천명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따라 나섭니다. 이 또한 공포·탐욕·무지의 소산입니다. 아니, 이 또한 공포·탐욕·무지를 이용해 상위 0.1%의 곳간을 채우는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은 필경 각자도사各自圖死로 귀결될 것입니다. 죽음은 다만 생물학적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다움·양심·도의들의 죽음도 죽음입니다. 이 폭력적 수탈 메커니즘이 목하 대한민국이라는 형해화한 공동체의 마지막 숨을 끊으려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국정의 메커니즘 자체가 특정집단의 사익추구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써먹고 필요가 충족될 때 언제든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세월호 선원들을 써먹고 버렸습니다. 선장은 36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렇게 세월호에 탄 아이들을 써먹고 버렸습니다. 209일 동안 완벽히 증거를 인멸한 뒤 ‘위헌’ 운운 잡음 섞어 법 쪼가리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이미 숱한 폭력이 자행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다움을 최소한으로나마 누리며 살고자 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깨뜨려야 합니다. 깨뜨리려면 메커니즘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알려면 진실을 얻기 위한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첫째, 두려움을 무릅써야 합니다. 우리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둘째, 탐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제 살 궁리만 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셋째, 무지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입니까? 이백 열하루 째, 버려진 넋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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