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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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는 두 개의 동사가 끈질기게 반복된다.·······‘이해하다’와 ‘용서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 책을 읽기 위한 두 개의 올바른 열쇠인가?

 

‘이해하다’는 네, 맞습니다.·······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제게는 하나 의 삶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제게 짐 지워진 말이지요.·······무조건적인 용서는,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뉘우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러나 말로만 뉘우치는 것은 안 됩니다. 저는 말로 하는 뉘우침으로는 만족하지 않아요. 팩트로써 자 신이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물론 너무 늦지 않게 증명해야겠지만 말이죠.(257-258쪽)

 

용서. 인간의 말 가운데 함부로 써서는 안 될 것들의 목록 선두에 놓아야 할 이 용서.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서 용서를 함부로, 가볍게, 무책임하게, 주제넘게, 그러니까 ‘개나 소나’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인플레이션 현상의 가장 큰 진원지는 아마도 개신교이지 싶습니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와 그것을 영화로 만든 이창동의 <밀양>을 기억하면 대뜸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업화 진행과 같은 궤도를 타고 급속히 약진한 개신교의 담론이 미디어 등을 통해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고 그에 따라 헐값이 된 두 단어가 다름 아닌 용서와 사랑입니다. 산업화 진행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 내용을 담아내기 어려워질수록 두 말은 더 많이 남용되었습니다. 남용될수록 속절없이 그 숭고함은 훼손되었습니다. 이제는 용서가 정치적 수사修辭를 넘어 적반하장의 가십으로까지 타락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사기꾼이나 진배없는 장사치가 ‘호갱님’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지절댑니다.

 

저 프리모 레비에게 수많은 독자들이 용서 여부를 물어왔다고 합니다. 왜 그들에게 용서가 그토록 중대한 관심사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 관심사가 대부분 모종의 당위감에 근거한 것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위감은 모름지기 심각한 허위의식에 터한 것일 테고요. 하지만! 타인에게 용서를 묻거나 권면할, 그러니까 짐 지울 자격을 가진 자 그 누구입니까. 신에게도 없는 그 자격을 심지어 흉내 내는 자 그 누구입니까.

 

프리모 레비는 단호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개나 소나’ 떠드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그야말로 ‘개나 소나’ 하는 것입니다. 피해 당사자는 전인적 변화로써 뉘우치지 않는 범죄자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범죄자를 인간으로서 진정 위한다면 그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임을 ‘이해’하는 만큼 뉘우칠 수도 있는 인간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 뒤 비로소 용서는 용서입니다. 무조건적 용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사회는 이 지점에서 치명적으로 망가졌습니다. 값싼 용서, 쓸개 빠진 용서, 물색없는 용서, 생색내는 용서,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용서가 어린아이 밥알 흘리듯 흘려지면서 정치는 통치로, 도덕은 도적으로, 윤리는 금리로 영락해갔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권력이 만든 폭력의 확대 메커니즘,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작품임은 물론입니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 용서는 철저히 개인 차원에서 교양인의 미덕으로 계발되는 웰 빙 상품이기조차 합니다.

 

이렇게 타락한 개념이 어떻게 마침내 전복되고 마는지 우리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참담하게 목격하였습니다. 죽인 자들이 도리어 ‘지켜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죽는 시늉을 하자 죽임 당한 자들이 그 악어눈물을 덜컥 닦아주고 말았습니다. 그 뒤 가해자들의 태도가 돌변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이 꼴 보기 전에 표표히 떠난 일은 미상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인제 그만 하자고, 들 합니다. 그 말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하기 전에 그 말 하는 사람 면면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과연 누굴까요. 40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프리모 레비를 두고 고작 207일 째인 우리가 어째서 그 말에 대해 마음을 써야 한단 말입니까. 용서, 어림없습니다. 시방 예은 아빠한테 주제넘게 용서를 입에 올리는 자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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