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비의 의도대로였다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자신의 첫 작품의 제목이 되었어야 했다.·······그러나 1947년 레비의 책을 처음 출판한 편집장 프랑코 안토니첼리는 책 첫머리의 서시에 들어 있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문장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레비에게 제목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최초의 제목은 표지 위로 올라오기까지 39년을 기다리게 되었다.·······왜 프리모 레비는 문학적 경험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경험을 한 뒤에 다시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 진실에 대한 필요 때문이라고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수사修辭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일종의 카운터 멜로디, 그러니까 수사에 맞서는 산문으로 된 논평이 필요합니다.(254-255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출간한 그 이듬해 프리모 레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누가 봐도 유서인 이 책의 제목을 39년 전 그것으로 다시 잡은 까닭은 수사에 맞서 진실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수긍이 가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그러면 수사에 맞선 진실 세우기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답은 프리모 레비가 직접 말한 부분에 있습니다.

 

논평.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성격을 분명하게 해주는 한 마디입니다. 논평이란 사건 또는 그에 관한 말이나 글의 시비·가치·영향 들을 따져 평가하는 행위 또는 그 글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이것이 인간인가」는 view이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review 인 셈입니다. 좀 더 분명히 하자면「이것이 인간인가」는 descriptive view이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prescriptive review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구태여, 아니 필연적으로 이렇게 변형된 수미상응을 취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인간인가」이후 39년 동안 살아온 삶에서 거듭 깨닫고 확인한 어떤 이치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being이 아니라 인간의 곡진·결곡한 실천으로 형성되는 것becoming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descriptive view와 prescriptive review 사이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간절한 당위 의식의 틈이 있습니다. 수사 놀이에 빠진 인간답지 못한 자는 이 틈을 넓히려 하고 진실 세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인간다운 자는 이 틈을 좁히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후 「이것이 인간인가」의 증언에도 아랑곳없이 프리모 레비가 목격한 세계는 이 틈을 결코 좁히지 못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descriptive view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prescriptive review가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술에다 논평의 죽비를 날릴 때 실천의 화두가 화들짝 깨어나는 것입니다.

 

서술도 논평도 끝낸 뒤 무엇을 해야 할까, 프리모 레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 무엇을 염두에 두고 논평을 써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수사의 덫에 걸려 책임도 느끼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한 채 키들거리는 인류에게 날릴 마지막 죽비. 논평의 완성.

 

자살.

 

남은 자의 침묵. 침묵으로 애도하고 침묵으로 실천해야 프리모 레비의 자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떠드는 자 모두 수사의 떼거지입니다. ‘아름다운’ 수사에 휘말려 범죄에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향한 프리모 레비의 완전한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직시해야 합니다. 진실을 세우고 기억하고 전하고 실천하고 기려야 합니다. 오늘, 203번 째 4월 16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