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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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실패에 대해서 무엇을 아느냐,·······맞다. 피 끓는 증오도 애타는 동경도 없는 삶이다. 그런 삶에 그 무슨 성공과 실패가 있겠는가. 나는 인간을 모른다.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나의 문학은 너무 편안하다.(720쪽)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을 세계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해는 오해의 일종이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이성복이 한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뒤집습니다.

 

“우리의 안도安堵는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 가운데 세계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오해는 이해의 일종이다.”

 

모든 생각이 틀리고(皆非) 모든 생각이 맞습니다(皆是). ‘틀렸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열면 맞는 것이고, ‘맞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닫으면 틀린 것입니다. ‘모른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열면 아는 것이고, ‘안다’ 하고 스스로 생각을 닫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인간을 다 알겠습니까. 어느 누가 인간을 다 모르겠습니까. 모순이 공존하는 이 진실은 인연의 결 다름에 있습니다. 내가 내 인연에 곡진하게 마음을 포개면 다만 나를 알 뿐입니다. 남의 인연은 원천적으로 접속 불가능합니다. 접속 불가능한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로, 미상불 그저 귀 기울이기로 할 때 전체 진실을 향해 가는 끝없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700쪽 훨씬 넘는 방대한 ‘말하기’인 「몰락의 에티카」 마지막 글의 부제가 김소진에 대해 ‘말하지 않기’입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김소진을 기린다고 말합니다. 실패를, 좀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을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편안한 문학의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실패로서 인간은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같은 존재(718쪽)이며,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열리든 간에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할 군상”(718쪽)입니다. 이런 존재에 대한 무지를 안은 채 어찌 이런 존재에 대한 옹호로서 문학을 말하는 문학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냐, 는 자기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의 없습니다.

 

「몰락의 에티카」는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를 ‘밥풀떼기’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명명에는 점 하나의 무지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밥풀‘때’기라고 해야 할 것을 밥풀‘떼’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무지는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를 (비록 낮잡아 부르기는 것이기는 해도) 위관계급 장교로 명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정확히 여기에 가 닿습니다.

 

관념적 조작은 무구한 ‘있음’들 앞에서 언제나 무력한 것이다.(718쪽)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몰락의 에티카」가 하는 반성과 유보를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기로 하고 읽는 김소진은 그러면 무엇일까요? 7년 뒤인 2014년 「몰락의 에티카」는 「눈먼 자들의 국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다.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한정되어 있으니 느낄 수 있는 감정도 제한되어 있다. 그때·······이야기가 아니면 그 감정에 가까이 다가갈 방법이 없다.·······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눈먼 자들의 국가」230쪽)

 

김소진을 읽으면 실패로서 인간이 지니는 슬픔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 공부야말로 “한낱 비평의 수사학에 불과한”(720쪽) 말로 실패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편안’하게 말하지 않는 길을 여는 수행일 것입니다. 김소진은 실패를 실패 아니게 하는 ‘선택’, 그 당위의 세계를 열어젖힘으로써 ‘매료’에 담긴 ‘편안’을 들추어내어 염치를 자극합니다. 이제 「몰락의 에티카」초심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5쪽)

 

못 먹게 돼 쓸모가 없어진 밥알 부스러기 같은 존재,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열리든 간에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할 군상을 옹호하는 문학을 통해 김소진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뀝니다. 그리고 질문하게 합니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매료된 자는 이 흔들림과 질문에 감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감응하면 편안 그 너머로 가야 합니다. 문학도 바뀌고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지금-여기로 돌아옵니다. 「몰락의 에티카」의 말하지 않기는 「눈먼 자들의 국가」의 이 말하기로 도약해야 합니다.

 

 

요컨대 진실에 대해서는 응답해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눈먼 자들의 국가」230쪽)

 

2014년 4월 16일은 「몰락의 에티카」의 무덤입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사흘 뒤 빈 무덤일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몰락의 에티카」에 대한 처음의 신뢰를 지키고 싶습니다. 더불어 그렇게 신뢰하는 제 자신과 제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도 지키고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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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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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5: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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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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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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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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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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