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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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 ‘기쁨’이라면,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 ‘슬픔’이다.(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142쪽.)·······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지배당하여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어떤 정념에 수동적으로 빠져들 때, 그 정념은 모두 슬픔이다. 슬퍼하는 자는 모두 노예다. 그래서 ‘명랑해져라’는·······정언명령이다. 슬픔이라는 정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상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694쪽)

 

첫 문장으로 인용된 내용이 기쁨과 슬픔에 대한 스피노자 해석의 진면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여기 있는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몰락의 에티카」진술이 스피노자의 견해를 온전히 수용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163-178에 있는 <우리가 ‘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 한 말> 내용을 보면 한정 수용이라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이 또한 그냥 여기 있는 부분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유는 스피노자를 둘러싼 시공의 STUDIUM을 담고 스피노자 자신의 PUNCTUM을 품은 것입니다. 오늘 서구 사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는 지젝의 발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럴, 그래야 할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해석은 서구세계가 장구한 세월 유지해온 빛과 어둠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신성의 빛을 향해 확산되어 가는 것이고,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죽음을 향해 어둠 속으로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둠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슬픔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A와 non A가 대칭되어 있을 때, 하나가 진리이면 맞은편은 반드시 비-진리이어야 하는 형식논리학의 일극집중구조입니다. 둘 다 진리인 경우는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슬퍼해서는 안 되고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상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묻겠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과연 노예일까요? 기뻐하는, 그러니까 명랑한 자는 자유인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감정 그 자체는 노예와 자유인을 가르는 기준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갈 때 슬퍼하는 게 왜 노예일까요?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 갈 때 명랑해야 자유인이란 말인가요? 이 질문이 당연한 진실을 겨냥한 것이지만 어쩐지 억지스러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너무 맞는 말이기는 한데 설마 스피노자나 「몰락의 에티카」가 그런 정도도 모르고 말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럴까요, 과연?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실제로 문제는 슬퍼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고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슬픔 이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함은 물론 일상이 무너질 때 비로소 문제 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오늘날 우리는 우울증이라고 표현합니다. 우울증은 더 작은 완전성, 그러니까 소멸, 그러니까 죽음으로 이행하는 수동, 그러니까 노예, 맞습니다.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본격적인 질문이 둘 생겨납니다.

 

첫째,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을 따르면 고착된 슬픔(우울증)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은 압니다. ‘힘내라’는 말이 격려가 아니고 ‘염장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물며 ‘명랑해져라’는 명령이야 어떻겠습니까. 힘낼 수 없는, 명랑해질 수 없는 조건 아래서 우울증에 빠져버린 사람에게 그것들을 주문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됩니다. 명랑해지는 것이 일종의 정신력 문제라면 정신력 강한 사람은 처음부터 우울증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정신력 약한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력 약한 사람에게 정신력 강해져라 명령하는 것은 ‘돈 있으면 빵 사먹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이 명랑해지기를 바란다면 명랑해지라고 명령하기 전에 명랑해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어야만 합니다. 그 조건이 바로 지금 그가 빠져 있는 명랑하지 못한, 그러니까 우울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명랑이라는 해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울증이라는 문제를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이 앞서야 합니다. 이것을 건너뛴 명랑은 실제로 또 하나의 증상, 그러니까 가면일 따름입니다. 가면을 참 얼굴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 고착된 슬픔(우울증)에서 헤어나 기쁨을 늘 유지하면 자유인이 되는가?

 

고착된 슬픔을 우울증이라 한다는 사실 쯤 누구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면 고착된 기쁨은 무엇이라 할까요? 우선 이 질문 자체가 거북하실 것입니다. 늘 기쁘면 행복하지 뭘 그것을 가지고 고착이라 하는가? 바로 여기가 함정입니다. 빛과 어둠을 선악 구도에서 보고 악은 없애야 하고 선만 남겨야 한다는 함정 말입니다. 선만 남겨졌을 때 그것을 과연 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선이란 악을 전제하고서야 성립하는 개념 아니던가요. 이런 이치를 따라 보자면 고착된 기쁨은 더 이상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라 할까요? 슬픔이 고착되어 허구한 날 울고 앉아 있는 것을 (우)울증이라 하니 기쁨이 고착되어 허구한 날 웃고 돌아다니는 것은 조증이라 해야겠지만 조증만 나타나는 경우를 따로 조증이라 하지 않고 현대의학에서는 정신분열증, 최근에 바꾼 이름으로는 ‘조현병’이라고 합니다. 순 우리말로 하면 아마 ‘미쳤다’가 가장 근사한 표현일 것입니다. 미친 사람을 자유인이라 하나요?

 

고착된 슬픔의 대안은 고착된 기쁨이 아닙니다.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착된 슬픔이 사람과 삶에 해가 되는 것과 똑같이, 아니 훨씬 더, 고착된 기쁨도 해가 됩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우울증은 인격적인 차원으로까지 침륜되었어도 장애 수준이므로 정신분열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착의 양극단은 모두 취할 바 아닙니다. 답은 중도입니다. 익히 아시다시피 중도는 중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양극단을 떠나 서로 마주한 경계에서 일어나는 관통-흡수 운동입니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일리一理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을 서로 관통하고 흡수해서 삶의 전체 진리를 형성해가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고착된 기쁨은 열반으로 담금질 되고 고착된 슬픔은 자비慈로 담금질 됩니다. 열반은 자리自利로, 자비는 이타利他로 나아갑니다. 기쁨과 슬픔은 서로 밀고 당기며 함께 사람과 삶의 진실을 열어갑니다.

 

기쁨으로 상처를 다스리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기쁨만으로는 상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상처는 다스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상처는 감응의 대상입니다. 상처 없는 영혼은 영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일극집중구조인 기독교와 형식논리학에서 시작한 서구문명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면서 오늘날 이기적 개인, 그러니까 영혼 없는 성공기계만을 양산하여 인류 전체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가는 과정에는 긍정주의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 긍정주의가 바로 ‘명랑해져라’는 정언명령의 충실한 개입니다. 이 개의 목줄을 따라가 보면 어디쯤엔가 스피노자의 굳센 손이 있습니다. 그런 스피노자라면 저는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4월 16일 이후 우리 곁에 슬픈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그들에게 ‘명랑해져라’ 해야 할까요. 대체 그들이 어찌 명랑하면 되겠습니까. 그 명랑이 어떻게 상처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명랑의 명령은 슬픔의 진실을 덮기 위한 음모이며 공작이 아닐까요. 명랑의 투명함 대신 슬픔의 결들이 겹쳐 있는 불투명함을 끈덕지게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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