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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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서사는 ‘주체와 타자’의 층위에서, 욕망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타자를 대상으로 축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부분)을 위해서 타자(전체)를 파괴하는 파국의 서사가 가능한 것이다. 욕망이 반성 없는 흐름이라면 사랑은 숭고한 단절이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네가 갖고 있지 않을 때, 나의 결핍을 네가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랑은 외려 그 결핍을 떠안는다. 두 결핍의 주체가 각자의 결핍을 서로 맞바꾸는 것이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부분을 위해 전체를 파괴하지 않고 부분을 채워 전체를 만든다. 욕망은 환유이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의 뜻이 거기에 있다. 욕망은 가까운 ‘부분’을 향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만 사랑은 유사한 ‘전체’끼리 자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욕망은‘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나는 너다’라고 말한다.(659쪽)

 

이른바 ‘연민정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인기 절정의 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끝났습니다. 전체 서사에서도 세부적 미학에서도 그리 탁월한 작품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 나름 전문가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성공적 측면이 있는가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 또한 악을 잘못, 적어도 서투르게 다룸으로써 악의 실상을 은폐한 전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결국 ‘근본 있는’ 부잣집 혈통의 의로운 인물(들)이 ‘근본 없는’ 천한 것(들)의 욕망에서 비롯한 악을 응징하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부동의 주제를 관철시킨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제 판단의 기본적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이 드라마가 연민정과 장보리의 성격을 뒤바꾸어놓았다면 과연 어땠을까요? 어찌 결말지었을까요?

 

목양견이 양 무리를 모으고 모는 이치가 있다 합니다. 위험에 처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리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양들의 본능을 이용하여 하나의 점처럼 양 무리를 모으는 것collecting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답니다. 그 뒤에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몰아가는 것driving입니다. 인간이라고 다를 까닭은 없습니다. 이미 익히 겪어온 바 아니던가요?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 대상은 죽음입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을 위협하면 인간은 공동체의 헤게모니블록이 주입하고자 하는 주류적 메시지의 중심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습니다. 존일숭미·반공·개신교신앙으로 무장하고 권력과 돈과 정보를 독점한 집단에 속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진실·정의·공존은 이미 가치의 땅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모인 집단은 반성 없이 타자를 파괴하면서 직진합니다. 오직 자신들만이 옳으며 선하며 아름답다고 확신합니다. 변방에 선 상실자들은 시기하고, 넘보고, 떼쓰는 그저 근본 없는 쌍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대한 구슬려 써먹다가 종당 죽여 없앨 존재들일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 되자’ 말합니다. 뒤로는 ‘너는 나와 다르다’며 밀어냅니다.

 

환유를 은유로 속여 욕망 추구의 영속성을 보장 받기 위해 마련한 안전장치가 바로 ‘국가’입니다. 전능한 로봇 말입니다. 자신들이 입력한 것만 투명한 진실이니 나머지는 모두 어두운 음모와 유언비어로 몰고 잡아들이고 급기야 숨통을 끊습니다. 우리가 최근 반 년 동안 몸서리치게 겪어온 국가란 혹시 이런 국가 아니었을까요. 기괴한 느낌으로 묻습니다.

 

‘근본 있는’ 인간 장보리는 시종일관 의로움과 선함을 유지해서 행복을 되찾고, ‘근본 없는’ 인간 연민정은 끝내 삿됨과 악함을 버리지 못하여 파멸하고 만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지난 반 년 동안 세월호 사건의 고통과 이렇게 동거해온 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설마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이 바로 그, 그 숫자란 말인가요? 섬뜩한 느낌이 들이닥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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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7: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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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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