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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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고도를 기다리며」 1막)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잠든 밤에’ 누군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그 개인의 눈물이 아니라 이 세상의 눈물이다. 다만 그들은 ‘당신’과 달리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자리에 운 나쁘게 서 있을 뿐이다.·······‘눈물을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이것이·······윤리감각이다.(642쪽)

 

사무엘 베케트의 말이 사실임을 조건으로 한 저 해석, 그러니까 누군가 눈물 흘릴 때 그 눈물은 세상의 눈물이고 그 세상의 눈물은 운 나쁜 사람이 짊어진 짐이라는 표현이 맞는다면 우리는 곤혹스럽게도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 구조 속으로 동시에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개인의 눈물이 사회의 눈물,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공적인 눈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저 여성학적 선언과 공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갈라 침으로써 돈을 상위 1%에 집중하는 세상에서 이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이자 인간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말입니다.

 

다른 하나, 눈물 흘리는 사람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뿐, 그러니까 눈물 흘리고 거두는 차이가 정녕 운의 문제일 따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운을 다른 어떤 말로 바꾸어 놓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눈물 흘리는 자리에 선 것이 그 개인의 책임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세상 자체 또는 세상에 속한 또 다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책임도 아니라는 뜻까지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허무를 부르는 음울한 노래입니다.

 

뜻밖에 여기서 하나의 윤리감각이 솟아오릅니다. 눈물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 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는 것입니다. 이 윤리감각의 터전은 무엇일까요? 운에서 의미가 나올 수 있을까요? 허무에서 당위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함께 우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의 의미를 알아서 당위를 끌어내는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학에 기대보아도 철학에 기대보아도 사회이론에 기대보아도 금방 들통이 나고 말 하찮은 논리뿐이기 때문입니다. “왠지, 그냥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642쪽) 그리 한다고 왠지 ‘모를’ 소리 하는 것이 고작 아닐까요. 하기는 윤리감각이든 생명감각이든 ‘감각’이란 것이 본디 그렇게 배어나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못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도 명쾌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이후, 그대가 그 감각 때문에 자꾸 울음소리 나는 곳으로 몸이 끌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알아차림에 터하여 다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대답이 가능한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불가능성은 차치하고 우리사회가 그 동안 그런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제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다가 4월 16일에 처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질문하는 일입니다.

 

“왜 내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함께 우는 길을 선택하려,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되기 위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앞선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었던 연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질문할 줄 몰랐으므로 공적인 눈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꼭 그만큼 공적인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가 새끼들 목숨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엎드린 채 넘어간다면 바로 그 다음 표적은 우리 목숨입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기는 거두면서 타인에게 세상의 눈물을 흘리도록 강제하는 자가 누군가? 그는 무엇으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더 이상 그 강제를 당하지 않으려면 이제 어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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