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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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달리 없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섹스는 결합인데, 결합은 불가능하고, 불가능을 반복하는 일은 고통이기 때문에·······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597쪽-마지막 두 문장의 순서 바꿈은 인용자)

 

결합을 위한 유일 유력한 길인 줄 알고 들어서서 가보니 도리어 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연을 목도하고 마는 섹스의 고통. 고통인 섹스를 직시해야만 알아차려지는 진실. ‘진실은 늘 고통과 더불어 오고,’ 그 고통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에게 섹스는 진실 은폐의 다시없는 수단이 됩니다. 진실을 외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보상, 그러니까 생명의 창조-그렇지 않은 섹스가 있음은 물론입니다-와 쾌락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결합했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천하의 마약인 셈입니다.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진실을 맞이하려면 곡진·결곡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결합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결합이란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결합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미 <아름다운 둘이 되려면-몰락의 에티카49>에서 말씀드렸듯 ‘봉헌의 기적’, 그러니까 (여기서) 섹스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룩한 행동입니다. 좀 더 진실에 육박한 기술記述은 “아름다운 둘이 되는 것이 바로 결합하는 것이다”입니다. 이 말을 두고 형용모순이니 역설이니 떠들기 전에 대뜸 알아차려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결합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여태껏 속아온 결합은 서구적,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것. 서구적, 변증법적 결합은 반드시 폭력을 전제한다는 것. 폭력을 전제한 결합은 없어야 한다는 것. 아니. 당최 없다는 것. 그것을 결합이라 한다면 극한의 분열을 결합이라 우기는 짓이라는 것. 우기는 섹스로는 참된 결합,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다는 것.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제 진경眞景으로 썩 들어서 볼까요. 아름다운, 아름다운 둘. 아름답다는 것이 핵심의 핵심입니다. <아름다운 둘이 되려면-몰락의 에티카49>에서 인용한 칼릴 지브란의 일부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그렇습니다. 저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597쪽)한 “심연”(597쪽)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바다를, 그러니까 “몰락”(5쪽)을 “선택”(5쪽)하였기 때문에 “참혹하게 아름다”(5쪽)운 것입니다. 아파서 아름다운 그 둘의 표정은 “숭고”(5쪽)합니다. 아프(痛)되 괴롭지(苦)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잘못 교배된 키메라 허깨비는 사라집니다. 허깨비를 피하려고 외면하는 일도 사라집니다. 직면하면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우리는 “섹스·······‘하는’ 시”(613쪽)라 합니다.

 

 

혼과 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아름다운 둘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바다를 메우라고 말하는 자, 그러니까 거짓 결합을 설파하는 자는 미상불 사탄의 주구일 것입니다. 사탄의 주구가 떼거리로 몰려들어 아름다운 둘들의 숭고함을 때려 부수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한 심연, 그러니까 아프디아픈 진실을 덮어야 제 곳간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생명과 안정이라는 미소를 흘리며 치명적 섹스로 홀리고 있습니다. 이 땅의 ‘시인’이여, 오늘이야말로 참으로 섹스 ‘하는’ 시를 쓸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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