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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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모든 욕망은 A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A 안에 있다고 간주되는 ‘A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라고·······말하지 않았던가.(419쪽) 비밀이 없는 시는 단 한 번 읽히고 버려진다. 투명한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420쪽) “시는 감추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드러내야 하며,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잘 감추어야 한다.”(431쪽)

 

문제는 A 이상의 어떤 것, 그러니까 비밀, 그러니까 감추고 있는 무엇, 그러니까 ‘영혼’(369쪽)입니다. 현실에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는 거의 없’(369쪽)는데 모두 그것을 욕망하므로 결국 인간의 문제는 죄다 여기에 있습니다. 감추고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인간 안에 있다고 간주되는 인간 이상의 영혼, 그 비밀에 대한 동경과 갈망, 아니 소유욕 때문에 인간은 서로 속이고, 상처주고, 죽이는 짓을 수만 년 동안 집요하게 되풀이해왔던 것입니다.

 

영혼, 그것은 영성의 거처입니다. 영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가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감추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드러내·······며,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잘 감추어야’ 기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상처를 지니는 사람만이 영성을 가집니다. 영성에 깃들 수 있는 사람 또한 그 상처의 틈에 찰나적으로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상처가 상처와 공현共絃을 일으킬 때 그 영성의 이름은 드넓음spaciousness입니다. 편재遍在ubiquity입니다. 신입니다.

 

상처를 외면한 욕망으로 영혼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욕망의 대상으로 신을 부리는 통속종교가 영성 없는 가짜 구원을 가지고 속임수 장사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들은 도리어 속이고, 상처주고, 죽이는 짓을 일삼는 권력과 자본의 후견인 노릇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영혼을 권력과 자본에 팔아먹을 때, 가장 잘 써먹는 상술은 다름 아닌 무지無知. 무지로 스스로 무장하고 그 무지로 타인을 감염시키는 무지무쌍의 마케팅입니다.

 

 

생때같은 자식들이 왜 죽어가야 했는지 밝혀달라며 곡기를 끊은 단원고 부모와 그 슬픔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 앞에서 폭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대학생이나 아줌마도 소름끼치지만 ‘종북세력 북한 가라’며 찬송가 부르고 고래고래 외치는 개신교도들을 보니 대체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까지 처절히 무지할 수 있을까, 아뜩하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들이 살아 있는 사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들 안에 저들 이상의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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