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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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소통되지 않고 치유는 점점 병리적인 놀이가 되어간다.·······도대체 이런 놀이들은 왜 필요한 것일까. 상처 때문이다.·······상처는 왜 놀이를 낳는가. “처음에 그는 수동적인상황에 있었다. (···) 놀이로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능동적인역할을 취하게 되었다.” 수동적으로 겪은 상처를 능동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다.(382-383: 큰 따옴표 안 문장은 프로이트의 견해임-재인용자)

 

상처는 반응reaction을 낳습니다. 반응은 병리적 상호작용입니다. 병리적 상호작용 가운데 재연이 있습니다. 재연 가운데 놀이가 있습니다. 놀이는, 결곡하고 곡진하면, 감응response으로 갑니다. 감응할 때 상처는 낫습니다.

 

놀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해는 정곡을 찌른 것이 아닙니다. 진실의 핵심과 어느 정도 교집합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동에서 능동으로 가는 것이 극복의 요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처 입은 사건을 놀이로 전환하는 행동은 자기가 겪은 사건의 접힌 진실을 펴는 옹골참과 그것을 자기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드넓음이 맞물릴 때만이 극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이는 그저 병리적 상태에서 머무르고 말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 입은 자의 놀이가 상처 없는 자의 놀이를 흉내 내다 끝나는 것만큼 참담한 비극은 다시없습니다.

 

[접힌 진실을 펴는 옹골참]

 

놀이는 상처의 증상을 예술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술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협소하고 진부하게 느끼고 알아차린 증상을 정확하고, 깨끗하고, 야무지게 펼치고 새로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술적일수록 옹골차고 옹골찰수록 예술적입니다. 미학적일수록 진단의학적이고 진단의학적일수록 미학적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더 아픈 곳을 더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눈에는 연극처럼 과장처럼 보입니다. 억압되어 있는 진실을 해방하려면 앙칼지고도 질탕한 연기가 불가피합니다. 우울이든 분열이든, 꺽꺽이든 깔깔이든, 너울너울 넘나드는.

 

[상처를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드넓음]

 

포개고 쪼개고 울고 웃으며 노는 동안 상처 받은 사람은 알게 됩니다. 그 상처가 내 인생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는 안 될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있어도 되고 있을만하다는 진실을. 전혀 상처 없는 인생으로 축복 받은 바도 없고, 온통 상처뿐인 인생으로 저주 받은 바도 없다는 진실을. 상처 받는 것이 인생의 본령이라는 진실을. 내 인생에 실린 상처는 종당 내가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그렇게 부둥켜안으면 아파서 더 애틋한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는 진실을. 애틋한 상처의 영지를 더하면 내 인생은 더욱 드넓은 우주가 된다는 진실을.

 

  

  

본디 놀이가 거룩함의 본진입니다. 이른바 고등종교 제의 따위로 떠올려지는 엄숙주의 거룩함은 상처로 운명 지워진 인간이 그것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인 뒤 쌓아올린 짐짓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짐짓퍼포먼스가 만들어내는 거짓 거룩함의 정체를 밝히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짐짓퍼포먼스보다 더 큰 진실의 전체에 주의해서 다시 짐짓퍼포먼스를 보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스꽝스럽지요. 그 다음, ‘짐짓퍼포먼스의 단위 하나하나를 해체해보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장난이지요. 놀이에 이런 검증방식을 적용하면 어찌 될까요? 이민하의 시를 읽으면 답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에 사이비가 엄존하듯 놀이에도 사이비가 있습니다. 놀이는 무심코시작해서 유심히진행되다가 무심히종결되어야 참된 놀이입니다. 처음부터 유심히하면 놀이가 아니고, ‘무심코로 시종일관하면 병리증상이고, ‘무심히가 생략되면 노동이 됩니다. 마음의학 어법으로 말하면 놀이는 치료를 향하되 치료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무엇입니다. 치료의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거룩함은 사라집니다.

 

여기까지 오면 향 맑은 영혼을 지니신 분은 미소 지으실 것입니다. 그래, 삶이 놀이로구나. 여기까지 오면 향 맑은 영혼을 지니신 분은 가슴 아프실 것입니다. 이 이치를 저버리고 엄숙무인지경의 세상을 만든 자들이 권력과 자본과 종교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충성하는 노동 일극집중구조를 강요하는 거로구나. 오늘도, 내일도, 향 맑은 영혼은 거룩한 놀이로 광화문에 좌정합니다. 거기서 고통은 소통되고 상처는 상동相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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