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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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자유’를 꿈꾸되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위장된 자유’로 남을 때 시는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시는 ‘자유의 위장’ 그 자체가 아닐까.·······그렇다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위장의 방법론과 은폐의 대상을 이해하는 일이다.(377-378쪽)

 

‘완전한 자유’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언어로 표현된 ‘완전한 자유’가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완전한 자유’라면 타인이 결코 그것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타인이 감지해낸 ‘완전한 자유’라면 실제로는 가짜일 것입니다. 적어도 언어에 실려 모습을 드러낼 운명인 한 “대상을 희미하게나마 거느릴 때” 자유는 ‘자유다운 자유’일 수 있습니다. ‘자유다운 자유’이려면 누림이 가능해야 합니다. 누림이 불가능한 분열적 자유는 그 자체로 정신병입니다. 누림이 누림다우려면 함께 누림이어야 합니다. 함께 누리기를 거절한 초월적 자유는 그 자체로 반인간적 범죄입니다.

 

우리 삶의 최후 목표가 자유, 그것도 ‘완전한 자유’라고 하면 시가 할 일은 자명합니다.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끝까지 추구해 ‘완전한 자유’로 육박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대상을 희미하게나마 거느릴” 각오(!)를 다져야만 합니다. 그 각오가 위장의 미학을 옹골차게 닦아세울 것입니다. 위장의 미학이 옹골찰수록 대상은 절묘하게 희미해질, 그러니까 모호해질(김행숙) 것입니다. 희미하고 모호해진 대상이 마치 낫에 베어지는 찰나의 풀처럼 존재의 마지막 향기를 뿜어낼 때 ‘불완전한 완전’은 ‘완전’을 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이라는 말만큼 우리사회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완전 좋다, 완전 예쁘다, 완전 맛있다·······물론 과잉된 느낌과 평가가 수반된 표현입니다. 사회심리적인 근거를 분명히 지니고 있겠지요. 함량미달의 유사품이 광고에 힘입어 대량 유통되는 사회에서 소비자가 겪는 심리적 갈증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광고와 유통의 논리를 내면화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온갖 매체를 연예인이 장악하고 있는 스타시스템 아래서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저들이 입에 올리는 순간 공식적이고 국민적인 말이 될 뿐만 아니라 말이 주는 분위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풍조의 최종 배후에는 물론 권력과 자본과 종교가 카르텔을 형성하여 일으키는 정치적 부조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거할 때만 되면, ‘완전’ 공약. ‘신상’ 나올 때만 되면, ‘완전’ 성능. 헌금 걷을 때만 되면 ‘완전’ 축복. 천태만상의 사기 카드를 꺼내들지만 두 달 뒤에 어김없이 오리발 내미는 파렴치 마케팅.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지배층의 존재양식입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드러나고 있는 가짜 ‘완전’의 실체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의 ‘완전’에 대한 자기최면을 더욱 맹렬하게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사회의 슬픈 현주소일 테지요.

 

완전하지 못한 것을 완전하다고 호들갑떨 때 우리는 속임 당하며 또 그 방식으로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루한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참된 자유, 그것도 ‘완전한 자유’를 꿈꾸려면 허접한 말에 중독되지 말아야 합니다. 허접한 말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시를 읽어’야 합니다. 시에 담긴 위장의 방법론과 은폐의 대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를 읽어’ 자유다운 자유를 찾은 시민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슬픔과 어둠 속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나중까지 함께 앉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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