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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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라는 말은 서글프다. 그 말에는 어딘가 ‘포기’의 냄새가 난다.·······누군가를 포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뿐이다. 결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370쪽)

 

흉고심하지결전간의대시계탕(胸苦心下支結癲癎宜大柴桂湯).

 

이렇게 써놓은 글을 제대로 읽고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장담하건대 500명,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의 0.001% 미만일 것입니다. 이는 한의학 고전 「상한론傷寒論」에 의거한 진단과 처방을 현대적으로 응용한 것입니다. 현직 한의사 가운데서도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인 까닭은 大柴桂湯대시계탕이라는 처방 이름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문장 전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전간癲癎epilepsy, 그러니까 간질병 치료를 해야 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상관없이 이 문장을 읽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반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가지고 있어요 댁들처럼 (당신)이라는 가죽주머니를 나도 가지고 있지요

 

가령 위 시는 황병승의 <Cheshire Cat's Psycho Boots_8th sauce-앨리스 부인의 증세>의 처음 두 문장입니다. 시 제목, 어떠십니까? 저 두 문장 어떠십니까? 흉고심하지결전간의대시계탕(胸苦心下支結癲癎宜大柴桂湯)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한의학 문장은 일반인이 최선을 다해 읽지 않아도 되므로 책으로 나올 엄두도 못 내지만, 저 시는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4쇄를 찍어낸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에 실려 일반인이 최선을 다해 읽는 대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읽는 일반인 가운데는 저도 있습니다. 제가 혹 저 한의학 문장을 담은 책을 내면 황병승 시인이 최선을 다해 읽을까요?

 

이런 비대칭은 비단 저명한 시인 황병승과 무명의 醫者 강용원만의 차이는 아닐 것입니다. 문학과 한의학의 차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가 인간에게 지니는 의미에서 이런 경사가 비롯하는 것일 테지요. 비록 ‘증후’일뿐일지라도 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 하고, 심지어 처방까지 붙어 있을지라도 한의학 문장은 극소수의 사람한테만 그 뜻을 드러내도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시는 ‘증후’로서 시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어떤 힘이므로 우리는 안간힘을 써서 난해의 난해를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란 아무래도 그런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발표한 ‘난해시’ <세월호-유민이의 꿈> '포기'할 자격 얻으러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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