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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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는 어디를 보는가.·······옆을 본다.(353쪽)

 

이렇게 바꿉니다.

 

“견성見性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권세와 부에 기대지 않고 전능한 신에 귀의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 구원을 보는가.·······이웃에게서 구원을 본다.”

 

나의 구원이 너에게 있습니다. 아니 너 자체입니다.

 

윤동주의 <병원>을 읽습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가 본 “”은 다름 아닌 “그가 누웠던 자리”입니다. 아픈 네가 햇볕을 쪼이던 자리, 그 사소한 희망, 그 하찮은 온기의 자리가 아픈 내가 누워볼 자리입니다. 유민 아빠가 누웠던 바로 그 자리가 우리 모두 함께 누워볼 자리입니다.

 

가뭇없이 정의 사라진 이 땅에서라면 가없이 옆으로 번져가는 생명의 연대만이 깊음 너머이며, 두터움 너머이며, 높음 너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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