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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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풍요롭고 인생은 아름답다,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구원에 대한 감각’이다. 구원 그 자체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각이 망실되어가는 상황이 더 치명적이다.·······지금은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선지자조차 지쳐 떨어진 밤”·······이다.·······설산은 있다. 그곳으로 오라. 설산은 없다. 그래도 오라.(345-346쪽)

 

구십 줄에 접어든 어떤 여성 어르신이 침 맞으면서 제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침 맞으면 나아져서 오는 거 아녀. 무슨 수를 써도 아파. 아프니까, 오는 거여.” 

 

그 날 저녁 자꾸 그 말씀이 떠올라 막걸리를 가슴에 들이부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계는 풍요롭고 인생은 아름답다,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말하는 순간이 아니고, 무슨 수를 써도 아파. 아프니까, 오는 거여,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제가 ‘구원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구원 자체의 망실보다, 침을 든 제 손 감각이 먼저, 망실된, 아니 있어도 허망한 상황이었던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정반대로 구원에 대한 감각이 너무 예리해진 나머지 날刃이 뒤집어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나 결국 마찬가지 아닐까요?

 

세계는 풍요롭고 인생은 아름답다,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하는 권력집단의 협잡술에 속아, 지금-여기 숱한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감각이 망실되어가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실제로 풍요와 아름다움 속에 산다면 구원은 당연히 불필요할 것이나, 자살률 1위인 우울공화국인데 구원에 대한 감각이 망실되다니. 권력이 문제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면 구원은 당연히 불필요할 것이나, 일부러 죽여 놓고도 교통사고라 잡아떼는 살인공화국인데 구원에 대한 감각이 망실되다니.

 

게다가, 지금은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선지자조차 지쳐 떨어진 밤”입니다. 말 깨나 하던 자들, 글 깨나 쓰던 자들, 죄다 최선을 다해 비겁해진 세월입니다. 이런 판국이라면 구원의 감각을 지니고 아니고, 의 차이는 소멸하고 맙니다. 낫든 안 낫든, 설산이 있든 없든, 우리의 언어와 몸짓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아프니까 오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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