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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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스스로 멸망함으로써 자기의 영광을 보존한다. 이 멸망과 영광의 동시다발적 화음·······상상적 자아를 모두 소거하여 남는 텅 빈 장소, 그곳에서 비로소 무의식이 점멸한다.······그 점멸 속에 진실이 있다·······그 점멸만이 ‘주체’·······다.(181-191쪽)

 

자아는 말하자면 권력과 동의어입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주변의 모든 존재를 자신의 내면과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욕망의 작동인作動因입니다. 대칭성의 구성·운동인 세계의 진실을 파괴하고 일극집중의 구성·운동을 일으키는 힘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자아입니다. 사회정치적으로는 매판독재세력이 그것입니다. 문학적으로는 미학적 보수에 터한 이른바 서정시에 집착하는 부류가 그것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분열스펙트럼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분열스펙트럼 개념은 서구 정신의학의 교과서적 명칭은 아닙니다. 자아의 경계선을 부동의 것으로 설정하고 그 경계 안의 자아 영역을 지키기 위해 경계 밖 존재에 대해 무관심·외면·무시·이용하거나 희생시키는 태도를 취하는 일련의 심리적·실천적 경향을 말합니다. 물론 이 경향이 극단적으로 강화된 최후 결말은 난공불락의 자아요새가 아닙니다. 처참한 자아붕괴입니다. 자아만 지키겠다고 날뛰면 그 자아조차 못 지키게 마련입니다. 경계 밖 존재를 망가뜨리면 자아도 망가지므로 결국 둘 다 망가지는 길이 자아집중의 대로大路입니다.

 

정녕 자아를 보존하고 싶다면 스스로 멸망해야 합니다. 소거해야 합니다. 중심이 텅 비면, 점멸-참으로 놀랍고 멋진 표현입니다!-하는 무의식이 나타납니다. 점멸하는 무의식은 자아의 영토 의식이 사라진 부정不定적uncertain·확률적 존재입니다. 아니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자아를 벗어던진 참된 주체입니다. 스스로 자아를 멸망·소거한 주체가 또 다른 주체와 만나 대등한 소통을 이룰 때 비로소 분열스펙트럼 질환은 치료됩니다.

 

우리사회의 상위 0.1%는 죄다 이 분열스펙트럼 질환을 앓고 있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 아래, 심지어 하위 0.1% 집단에게도 이 질환은 있습니다. 이들이 더 심각합니다. 남의 자아를 지키느라 부화뇌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예술, 특히 문학하는 사람도 분명히 끼어 있습니다. 자각하면서도 하는 것이면 예술인이 아니고 자각 못 하고 한다면 예술이 아닙니다. 이런 평가는 의학, 무엇보다 정신 치료하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정신 치료한다면서 자아에게 긍정주의 영토를 불하해주는 자들은 스스로가 분열스펙트럼 환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물귀신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 정치와 예술과 의학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목표도 하나입니다. 치료, 곧 양육입니다. 모든 존재는 생겨나서 자라고, 그 자람의 끝, 그 끝의 영광으로 죽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모든 과정이 바로 치료이자 양육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이 세 힘이 합세하여 치료 아닌 살상을, 양육 아닌 학대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참변 생존자인 단원고 학생 ㄷ양 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특히 단원고 학생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이 반복됐다.”

 

아,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이렇게 죽여 놓고도 사고라 합니다, 이런 상처를 주고도 낄낄대고 사진 찍고 은폐하고 놀러갑니다. 이들을 살상해야 자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의 치밀한 음모는 이 시각에도 더 큰 살상을 준비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여기서, 문학은, 의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점멸하는 주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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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17: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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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1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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