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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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우울증이란 무엇일까요? 아까 「5시 57분」이 도착하는 바람에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에서 말이 끊겼습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우울증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그러니까 인간 존재의 심연에까지 가라앉는 고통의 침강 운동이자 그 상태입니다. 죽음이 삶에 스며들고 번져가는 것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아야 하는, 지각과 무력이 가장 날카롭게 양립하는, 잔혹의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은 유한한 생명으로서 인간에게 이치를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어긋남, 어긋남이 몰고 오는 상처, 상처가 키워내는 격정emotionalism입니다. 우울증은 자기 존재 자체와 그 가치·의미를 과도하게 ‘접는’, 그러니까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격정입니다. 격정 가운데서도 가장 격하고 어두운 것이 우울증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가장 격하고 어두운 것이 우울증입니다.

 

한 인간 공동체의 본질은 환희에 찬 밝은 중앙이 아닙니다. 고통에 찌든 어두운 변방, 곧 경계입니다. 예술, 특히 문학이 터해야 할 곳이 바로 여기, 그러니까 우울증의 땅입니다. 여기서 그 실상을, 그러니까 증상을 ‘정확히’, 그러니까 ‘참혹한 아름다움’으로 그려내야 합니다. 이것이 문학의 윤리학입니다.

 

이제 정말 중차대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문학이 윤리학적 소임을 다하면 우울증은 어찌 되는 것일까요? 얼른 생각하면 치료가 답일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원까지도 가능할 테지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문학의 윤리가 치료를 영토 삼는다는 것과 문학 텍스트를 치료의 방편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문학 자체의 윤리는 우울증의 진면모를 잔혹한 서정으로 낱낱이 결결이 드러내는 것을 의무로 여겨야 합니다. 고통이 소통을, 소통이 진실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빠근하고 야물딱지게 말해야 합니다. 손쉽게 재빨리 치료로 치달아버려 소통과 진실을 엄폐하는 세상 풍조를 고발해야 합니다.

 

이 세상 풍조를 주도하는 초국적 제약회사는 우울증을 그저 기분/감정의 문제로 가볍게, 그러니까 저들의 말마따나 ‘마음의 감기’ 따위로 여겨 프로작만 먹으면 낫는다고 생각하게 유도합니다. 그렇게 약으로 틀어막아 떼돈도 벌고 조증사회도 유지해가는 게 그들의 목표입니다. 우울증의 본래 진실, 그러니까 고통으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을 숨겨 광기의 돈 잔치를 영속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는 한 우울증 치료라는 행위 자체가 거대한 음모입니다.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우울증의 진실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가치문제와 직면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고통이 아니라면 세상에 남는 것은 광기뿐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가치문제에서 인간이 받는 고통의 실재the Real를 알 수 있습니다. 우울증 앓는 고통스러운 인간이 아니라면 인류에게 남는 것은 광인, 그러니까 비인간뿐입니다.

 

문학은 우울증을 가차 없이 드러냄으로써 우울증이 다만 고쳐야 할 질병이거나 없애야 할 고통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또렷이 해줍니다. 희망과 가치의 전언이며, 무엇보다 거룩함으로 향하는 자세인 우울증을 알게 합니다. 병이어도 품고, 고통이어도 달래며 우울증과 함께 가는 도정에서 경험하게 될 삶의 광활함spaciousness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막다른 곳에 이르렀습니다. 여태까지 해온 이야기의 대우對偶를 말하면 어떨까, 궁금해집니다. 우울증 이야기가 아니면 문학이 아니다, 쯤 될 텐데요. 과격해 보이시나요? 우울증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느리게 다부지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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