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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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이 아닌 것은 세계가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 뿐이다. “고통의 절대성만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유일한 것이다.”(아도르노)·······그래서 우리에게 여전히 유물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고통의 유물론이어야 한다.·······(61쪽)

 

무한중첩의 역설이 세계의 진실을 구성합니다. 역설은 대칭, 가령 전자electron와 광자photon의 마주함과 같은 것입니다. 이 대칭의 어름에 온새미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고통, 엄밀히 말해 통痛, 그러니까 아픔입니다. 아픔은 세계의 숙명입니다. 숙명은 절대의 관통력으로 세계를 향해 들이닥칩니다. 세계는 숙명을 자발적으로 흡수해 들여야 합니다. 흡수하면 넘어섭니다. 넘어서면 창조의 지평선이 열립니다. 요컨대 고통은 창조의 전제입니다.

 

결론이 명쾌하다고 거기 쉽게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가 단도직입으로 고통을 흡수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실패합니다. 고통은 본디 자타自他와 상변常變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미끄러짐과 엇나감, 간단히 말하면 접힘의 사건입니다. 이 접힘의 사건을 저와 같은 의자醫者는 병이라고 부릅니다. 병은 고통을 심화·증폭·재생산합니다. 그 심화·증폭·재생산의 갈래는 이렇습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타자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경계가 강화되고 자기 보호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분열형의 병입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자기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경계가 붕괴되고 자기 포기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우울형의 병입니다. 세계의 공시적synchronic 지평에서 대칭이 무너져 생긴 경계선의 병입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상, 곧 불변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고착이 강화되고 반복적 규칙성으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강박형의 병입니다. 고통을 느낄 때 문제의 원인을 지나치게 변화 쪽으로 기울여 잡으면 지속성이 붕괴되고 변덕으로 편향되어 실패합니다. 전환형의 병입니다. 세계의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대칭이 무너져 생긴 변곡점의 병입니다.

 

 

절대 고통, 그러니까 유물론적 고통에서 발원한 이런 구조적인 실패/병에 편승하여 세계를 억압과 착취, 종당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세력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풍요, 그리고 구원의 탈을 뒤집어쓴 권력·자본·종교가 바로 그 저주의 삼두마차입니다. 이들에 맞서려면 단 하나의 대오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몰락의 에티카가 인용한 김훈의 남한산성서문에 있는 표현을 재인용함.)에 서는 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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