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의 윤리학과 진실의 윤리학이 있다. 선의 윤리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다. 그것은 치명적인 진실의 바이러스를 선의 이름으로 퇴치한다. 반면 진실의 윤리는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리셋 버튼이다. 그것은 때로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되는 벼랑 끝에서의 한 걸음이다.(18-19쪽)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2013년 프랑스 대학 입학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 문제입니다. 프랑스 아이들이 이런 문제에 논문 식 답안을 쓸 수 있는 철학을 배우는 동안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국민윤리를 주입식으로 배웁니다. 바로 이 차이가 세월호 참극을 낳은 것입니다.

 

국민윤리라는 교과목은 지배이데올로기 아래서 ‘선’한 국민으로 이이들을 길들이기 위해 정당성 없는 정권이 만들어낸 홍보수단입니다. 선이 애당초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사회 현실에서 본다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라고 선을 규정한 것은 지극히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하다”는 표현처럼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한” 사람처럼 시스템적인 악에 잘 순응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선의 반대말이 악인데도 이렇게 길들여진 “선한” 사람들은 분연히 악의 편에 섭니다. 사회정치적 스톡홀름증후군이랄 밖에요.

 

선은 길이 아닙니다. 선은 접힌 현실을 펴지 않은 채 “차카게” 머리 조아리는 것입니다. 진실이 길입니다. 진실은 접힌 현실을 펴기 위해 내디디는 벼랑 끝에서의 한 걸음입니다.

 

 

마음치유의 일선에 선 사람의 처지에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한 것은 약한 것이다. 약한 것은 악한 것이다.”

 

무엇보다 우울증 앓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주위에서 언제나 착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착함은 거절하지 못 하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퍼주고, 보살피는 드넓은 오지랖으로 나타납니다. 그 오지랖은 본인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타인에게 ‘봉’으로 각인됩니다. ‘봉’은 착함의 경계를 한참 지나쳐 약함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그 약함은 끝내 자신을 파괴하고 맙니다. 우울증의 본령이자 최후입니다. 제 생명을 이렇게 파괴하는 것이 어찌 악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울증 앓는 사람들에게 우선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를 보냅니다. 이것은 자기 파괴적 선에 빠져 있는 진실을 알아차리게 하려고 내는 틈입니다. 그 틈을 통해 불편한 진실이 배어들도록 합니다. 그 다음,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할 무엇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모순에 맞닥뜨린 그들이 혼란에 빠져들 때 곁을 지킵니다. 혼란의 소용돌이가 빚어내는 “숭고한 표정”(5쪽)에 함께 물들어 갑니다. 더 이상 ‘봉’은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