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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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5쪽)

 

 

“지면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참혹한 아름다움이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다.” 이 문장은 서로 버성긴 말 세 쌍을 겹으로 안고 있습니다. 자연스럽지 않음을 넘어 탐탁하지 않습니다. 탐탁하지 않음을 넘어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러움을 넘어 당최 말이 안 됩니다. 지면서 이기다니. 참혹하게 아름답다니. 텅 빈 채로 가득 차다니.

 

세계는 본디 서로 버성긴 진실이 접속사 없이 마주서는 장엄한 대칭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대칭성을 자발적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면서 세계는 영원한 창조 사건을 일으킵니다. 대칭이 깨뜨려지면서 생겨난 어떤 질서를 영속적으로 소유하려는 지향에너지를 과잉진화의 부산물로 지니게 된 인간이 이 세계의 자기창조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인간의 그 잔혹한 지향에너지는 일극집중구조를 지닌 권력·자본·종교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일극집중구조에서는 질문이 불가능합니다. 공포 어린 복종·노예적 추구·조건 없는 숭배로 평정된 부동불변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속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자기들만 살아 있다고 확신하는 상위 0.1%도 실은 좀비일 따름입니다. 이 세계를 흔들어 바꿀 수 있는 질문은 한순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기꺼이 몰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에게서만 나옵니다. 선택하는 몰락은 불쏘시개처럼 제 몸을 살라서 큰 불을 지핍니다. 그 길 아니면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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