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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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씻김-“·······버려진 존재라는 고독감이 소녀의 마음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소녀를 괴롭게 한 것이 사실이나 저는 이제 과거의 그 바리가 아닙니다. 버려져서 원한을 품게 되면 재앙신이 되어 스스로를 심화지옥에 가둘 것이로되, 버려졌더라도 끝끝내 사랑을 품으면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먼저 깨달은 자의 소명으로 소녀는 버려져서 아파하는 여리고 어린 목숨들을 보살피는 이가 되고자 하오니 다만 그뿐이로소이다.·······죽음은 삶과 한 쌍이더이다. 죽음이 죽음으로만 방치되면 재앙일 것이로되 사랑을 얻으면 삶이 되더이다.·······버려진 존재라는 덫에 걸려 내가 누구인지 찾지 못한 채 헤매던 저를 약수지킴이 무장승의 사랑이 살렸습니다. 인생에는 매번 죽음의 순간이 닥치나 사랑이 없으면 죽음 앞에 엎어질 것이요 사랑이 존재한다면 삶이 되는 것이 생사의 이침임을 알았나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제가 세상에서 하고픈 일임을 생명수를 구해오는 여정을 통해 깨달았사오니·······”(195-196쪽)

「바리공주」가「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도한 것은 사랑, 이 한 마디입니다. 무엇보다 무장승과 바리가 사랑을 열어가는 과정과 의미의 갈피를 세세히 보살펴서 독자들의 감성을 다독거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 존재에게 필연으로 다가드는 상처와 치유, 삶과 죽음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은 ‘목숨 얻은 것들’의 처음과 끝, 앞과 뒤를 꿰뚫고 이어붙이는 무한 선순환의 감각이며 정보이며 지향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삶의 모든 구비에서 중요하거니와 무엇보다 청소년기에 결정적crucial 중요성을 지닙니다. 청소년기는 아이와 어른 사이 변곡점이자 경계선입니다.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보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시점입니다. 공시적synchronic 지평에서 보면 아이와 어른이 마주한 가장자리입니다. 청소년, 이 때, 이 자리에서 결정적 사건이 대부분 발생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장 결정적인, 그러니까 치명적인 사건은 인생의 시생대始生代에 일어납니다. 바리가 버려진 바로 그 때입니다. 이때는 버려진 아기에게 거의 모든 지각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봉인된 채 세월이 흐릅니다. 그 봉인이 뜯어지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청소년기입니다. 버려진 바리가 부모의 존재를 묻고, 아파하고, 원망하고, 수용하고, 몸부림치며 헤매는 격동의 시간 바로 그 때입니다.

그 때 방치당하면, 그러니까 다시 버려지면 재앙이 되고 죽음이 됩니다. 사랑이 닿으면 축복이 되고 삶이 됩니다. 축복과 삶을 불러오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상처의 인과와 무관한 새로운 인연이 피워내는 사랑입니다. 책임도 의무도 없는 타인입니다. 대가도 보상도 없는 제삼자입니다. 이런 사랑에서만이 창조인 치유, 치유인 창조가 일어납니다. 바리와 무장승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바로 이 진실을 ‘밑줄 긋고’ 전해주기 위해 김선우는 11년의 세월 동안 「바리공주」를 품고 있다가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낳은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바리는 상처를 넘은 치유, 죽음을 건넌 삶의 시공에 도달하였습니다. 싯다르타의 열반보다, 예수의 부활승천보다 설레고 짜릿하고 향기롭고 아뜩하고 신나는 세계입니다. 물론 바리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돌아옵니다. 상처와 치유가 만나는 어름으로. 삶과 죽음이 마주하는 가장자리로. 죽은 사람들, 버려진 것들의 혼을 이끌어 쓰다듬고 씻기는 황천강 가로. 실은 바리가 돌아온 여기가 더 설레고 짜릿하고 향기롭고 아뜩하고 신나는 세계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바리는 여자사람으로서 삶과 죽음을 함께 보듬는 신이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신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는 어미 구원신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사는 이 경이로운 삶에는 늘 그의 가족이 함께 합니다. 다른 어떤 신 이야기에도 나오지 않는 가족 구원신입니다.

 

우리 가슴 깊숙한 공간, 우리 내력 기나긴 시간에는 이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자리 잡아 흐르는데 이제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상처와 죽음에 휘감겨 있을까요. 누가 이 백성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입히며 죽음을 강요하고 있을까요. 세월호에 아이들을 가두어 죽인 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 상처를 넘게 하고 죽음을 건너게 하는 바리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 바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기다리는 것이 맞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이 질문들 앞에 결곡히 마주서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결기-칼 날 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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