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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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만남-“.......마음이 놓여 갑자기 웃음이 배어 나오려는 찰나였다.

해거름 어둠 속이 순식간에 날개 퍼덕이는 소리로 가득해지더니 바리공주의 시야가 검은 장막을 친 것처럼 돌연 컴컴해졌다.......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수리들과 박쥐들이 날카롭게 우짖으며 날개를 퍼덕이면서 까마득한 공중까지 원기둥을 쌓아올린 채였다.......새들이.......바리를 노려보았고, 원기둥 높은 쪽에 있던 거대한 독수리가 바리공주의 두 눈을 쪼려고 급강하하는 순간이었다.

“내 손님이다. 돌아가!”

굵직한 무장승의 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새들의 장벽이 사라졌다. 심장이 쥐여졌다 놓여나듯 바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천 마리 새들이 자신을 가두고 일제히 노려보는 사태는 지옥만큼이나 섬뜩하다고 생각하며 바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소?”

다시 무장승의 목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더니 구척 거구의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바리에게 손을 내밀어왔다.......”(138쪽)

 

곡진과 절망이 뒤엉킨 기다림의 결과 치고 무장승과 바리의 만남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밍밍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가 남장을 했기 때문에 무장승이 뜨악한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쌍방향 해결을 위해 김선우는 기다림 장면에 등장했던 검은 독수리 떼와 황금 빛 박쥐 떼를 다시 등장시킵니다.

 

한편으로는 무장승의 께름한 마음 상태를 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좀 더 살갑게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순의 경계에 피는 꽃 문장 하나.

 

심장이 쥐여졌다 놓여나듯 바리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장승이 안부를 묻고 손을 내밀기 위해 조작한 ‘설정’처럼 보이는 나름 극적인 파동波動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신뢰가 형성되어 손을 잡게 되는 극적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치 금시초문이라는 듯 생으로 나서는 말, 그렇지요, 털썩 주저앉았다!

바리의 털썩은 무장승의 털썩과 다른 털썩입니다. 놀라서 맥이 풀린 탓과 긴장이 풀려 안도한 탓이 한 찰나에 겹쳐 있습니다. 기다림의 털썩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털썩에는 손 내밀어주는 이가 없습니다. 만남의 털썩입니다. 만남의 털썩에는 손 내밀어주는 이가 있습니다. 시절인연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 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 테냐 후다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 소문 없이 만난 빈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_이병률의 <인기척> 전문

 

바리가 무장승을 만나 이루는 사랑은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는 그저 그러한 길입니다. 하지만 바리에게는 온전한 치유를 위한 특별한 길입니다. 상처 없앤 사람이 되는 향 맑은 길입니다. 하지만 무장승에게는 하늘사람으로 복귀하는 특별한 길입니다. 허물 없앤 사람이 되는 빛 부신 길입니다. 바리는 털썩 주저앉을 만큼 고된 건넘을, 무장승은 털썩 주저앉을 만큼 안타까운 기다림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얻은 사랑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바리는 공주를 ‘버리고’, 무장승은 하늘사람을 ‘버리고’ 황천강으로 흘러갑니다. 거기서 무얼 할까요.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버림받은 사람이 사랑으로 거듭나 마침내 자신을 기꺼이 버림으로써 버림받은 상처 속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는 무한선순환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힘 가진 무리 0.1%가 자신들만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무한악순환구조를 돌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날뛰는 강도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바리는 오늘의 황천강으로 나아가 저 무리가 해치고 버린 생명을 구해냅니다. 구원받은 바리데기들은 저 무리 잡아갈 저승사자의 길을 닦습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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