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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ㅣ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6. 금주령과 낭화 세 가지-바리가 유리산을 꿰뚫고 나온 것은 트라우마로서의 공포, 버려진 운명, 삶의 천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리는 일련의 깨침, 그러니까 치유 체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청태산 마고할미입니다.
마고할미는 “두 눈 사이에 청옥을 박아 넣은 것 같은”(109쪽) 제3의 눈을 지닌 욕쟁이 할미입니다. 제3의 눈을 지닌 것과 욕쟁이인 것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깊은 일치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3의 눈은 통속적 관점으로는 볼 수 없는 차원 높은 진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욕은 인간이 지닌 언어 가운데 가장 곡진한 것입니다. 거칠고 딱딱한 표현을 통해 돌연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선禪적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둘 다, 세계를 구성하는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실에 이르게 하는 탁월한 방편인 셈입니다.
마고할미가 제시한 과제는 빨래하기입니다. 빨래의 통속한 의미는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언젠가는 완수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차원에 있는 작업입니다. 검은 빨래 희게 하기지요. 그러나 흰 빨래 검게 하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통속한 빨래 의미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제3의 눈이 없으면, 마고할미의 욕이란 자극이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흰 빨래 더미의 빨래를 방망이질하면서 또 몇 밤이 지나간 어느 아침이었다. 바리공주의 표정이 일순 환해지더니 빨래 더미를 들고 개울가 흙바닥으로 나가 앉아 흙에다 빨래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물에다가만 빨래를 하란 법 있나. 세상이 처음 날 적에 지수화풍이 그 모체였으니 흙 묻은 옷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람살이의 생각 한끝 차이지.......
그렇지. 생각 한끝 차이지. 연꽃이 꽃잎을 여는 것도 진흙탕을 통과한 다음부터지.
흙빨래를 해서 걷어진 빨래를 다시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며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거무튀튀해진 빨래들이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리공주의 숱 많은 머리칼 색을 꼭 닮아 있었다.”(110-111쪽)
그렇습니다. 빨래는 다만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빨래는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위한 능동적·창조적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각 한끝 차이”로 이런 발상을 한다면 세상은 더 이상 고통도, 악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생각 한끝 차이”를 실행하기 지난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리가 이런 깨침에 이른 것은 마고할미의 깨우침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전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린 유리산 체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리는 이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부분은 오류라는 것. 세계의 진실은 비대칭의 대칭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이 깨달음의 끝에 바리가 다다른 곳은
“기이한 곳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바리는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색 물고기들이 가득 노니는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바리는 그 위를 걷고 있었다.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가다 보니 눈앞에 불쑥 검은 섬이 나타났다.”(113쪽)
진실을 온 몸에 지닌 사람은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어린 시절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길디긴 세월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한창 아플 때 자주 꾼 물 꿈은 시퍼런 물에 빨려 들어가거나 무서워 도망치는 꿈이었습니다. 치유가 익어갈 무렵에 더 자주 꾼 꿈은 물에 빠지지 않고 달리거나 나는 꿈이었습니다.

이 순간 문득 저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숨져간 아이들, 우리 시대의 바리들을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치유해서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 땅의 어른들이 끝내 잊지 않고 정치경제적·사회역사적 처결을 관철해내야 할 것입니다. 치유와 자유는 단지 부분적 뒤치다꺼리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