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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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숨 얻은 것들의 슬픔-“.......“.......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 왕가의 일이온데, 지금 불나국 백성들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더이다. 그 원인이 아버님의 병환 때문이라 하니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을 위해 아버님의 쾌유를 도모하겠나이다.”

침착하고도 당당한 바리공주의 목소리가 어전에 울려 퍼지는 동안 대신들이 엎드려 감읍하였다.

바리공주가 오구대왕 앞으로 세 발자국 더 나아가며 말했다.

“대왕이시여. 듣자니 정사가 바로잡혀야 백성의 삶이 평안해진다 하니, 소녀, 생명수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소녀가 생명수를 구해 와 아버님을 살린다면, 아버님의 목숨은 불나국 백성들에게 빚진 것이오니, 기억하고 또 기억하소서.””(98쪽)

 

11년 전 <바리공주>가 생명수 구하러 가는 이유는 이른바 효의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궁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목숨 얻은 것들의 슬픔과 나라의 피폐해진 모습을 목격하고 가슴에 불이 이는 경험을 했지만 이를 삶의 결단으로 동기화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자신의 결단이 지니는 대승大乘적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만 딸로서 아버지 목숨을 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인 아버지가 병들어 정사를 바로 살피지 못해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가는 것입니다. 하여 생명수로써 구해지는 왕의 목숨은 백성들에게 빚진 것임을 명토 박고 있습니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좀 더 깊은 통찰, 좀 더 섬세한 공감, 좀 더 광대한 자비심으로 세상을 보듬습니다. 세상을 보듬는 힘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바리공주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의 고통 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또한 부끄러웠다.”(95쪽)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의 부끄러움에 대한 감수성은 수미산을 나와 불나국 현실을 보는 순간 단박에 법과 도덕의 껍질을 꿰뚫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해 육박해 들어갑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차립니다. 타인의 고통에 극진히 참여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차립니다. 결국 인간 존재란 홀로 성립하지 않으며 타인과 더불어 성립한다는 도저한 진실에 단도직입으로 들이닥친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고통이 크다 해도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너무 편안히 살았구나.”(93쪽)라는 부끄러움밖에 고백할 말이 없다는 진실을 온 영혼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탱맑은 감수성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리 자신이 버려진 존재로서 두려움, 깊은 슬픔, 그리고 절망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바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치유의 길임을 배웠습니다.

 

버려졌기 때문에 바리는 자신을 더욱 사랑했다. 한 번 버려졌으니 절대로 두 번은 버려지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더욱 사랑해줘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비럭공덕할멈과 할아범의 지극한 사랑은 바리를 그렇게 키웠다.”(95쪽)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가짐과 힘이 옹골차고 튼튼하지 못하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 타인에게 이르지 못합니다. 흔히 이기적인 사람을 가리켜 “자기 사랑이 지나치다.”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착각은 부끄러움의 감수성을 갉아먹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착은 그 자체로 질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대개 사회 최상위에 포진합니다. 권력, 자본, 종교를 쥐고 앉아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병들게 합니다. 질병을 가치로 둔갑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추종하게 합니다. 죽기 살기로 추종해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절대 다수는 결국 절대 신앙구조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속는 줄도, 착취당하는 줄도 모른 채 고통에 중독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통째로 버려진 것만 같았다.......백성들은 조정으로부터 내팽개쳐진 채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95쪽)

 

 

통째로 버려지다니, 아, 이 소름 돋는 일치감! 오늘 우리는 이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성들을 통째로 버리는 조정이 그 강퍅함을 더해가는 나날을 견디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질병을 고치는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생명수를 구하러 고난의 길을 떠나는 바리는 과연 누구일까요? 바리의 희생으로 질병에서 놓여나는 지배자가 과연 백성에 빚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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