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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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날 전통종교 사상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간결한 소개말 뒤에 대여섯 줄로 요약된 줄거리가 붙은 이야기 하나를, 그야말로 ‘우연히’ 만났습니다. 처음 본 내용에 대뜸 사로잡힌 이후 제 삶과 사유는 그 이야기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 하였습니다. 사십 년에 걸친 작업 끝에 빚어낸 제 인문한의학의 원효 패러다임도 따지고 보면 제 무의식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그 이야기를 역사의 맥락으로 이끌어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 리. 공. 주. 다름 아닌 그 바리공주가 제 인생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바리공주 이야기에 매료되고 나서도 꽤 오랜 기간 동안 그 이야기의 세세한 갈피들을 알지 못 한 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제 나이 마흔이 다 된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태어난 것입니다.

 

아내가 출산휴가 끝내고 회사에 복귀한 뒤 저는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그 기간 내내 아기가 잠들기 전에 반드시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바리공주였습니다. 나중에 고마운 ‘이모’께 아기 양육을 맡긴 뒤에도 제가 재울 때는 언제나 바리공주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전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 내용이 너무나 짧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행운은 바로 이 문제에서 찾아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상상으로 이야기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리 한 것입니다. 아기가 잠들고 나서도 얼마 동안은 소곤거리듯 여운을 남기며 이야기를 이어나아가려면 제법 긴 줄거리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특별히 사전에 골똘히 생각하고 구성해두었다가 말해주는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그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로 만들고 그것을 기억해놓았다가 다시 살을 붙이는 식이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기를 잠재우는 데 매우 적절한 분량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기도 퍽 그 이야기를 즐거워하며 들었습니다.

 

더는 그런 잠재우기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어느 날 또 ‘우연히’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 <바리공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 세상에나, 어떻게 이런 일이.......제가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 줄거리가 그 책에 거의 그대로 실려 있었습니다! 온 몸에, 아니 온 영혼에 들이닥친 경이로움이란 이루 다 형언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음은 물론입니다. 그 날 이후 저는 바리공주가 제 무의식에 깊고 넓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확신은 우리 민중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 천하시인(이라고 제가 일컫는) 김선우는 11년 전에 어른이 읽는 동화로 <바리공주>를 펴낸 바 있습니다. 지난 5월 말께 그 책을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로 개작하여 냈습니다. 이 작업은 어제 오늘 뚝딱 만들어진 생각의 과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마무리 짓고 있었을 그 무렵의 4월 16일, 탐욕에 사로잡힌 어른들이 생떼 같은 아이들 목숨 삼백을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려 버리는, 그러니까 “바리”는 참혹한 변을 일으켰으니 김선우의 심장이 거기 오래토록 머물렀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김선우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른사람’으로서.......많이 부끄럽습니다.”(209쪽)라고 썼습니다. 저는 더욱 부끄럽습니다. 그 마음으로 <바리공주>와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를 대조해가면서 찬찬히 읽었습니다. 단어 하나까지 세심하게 다듬어 고친 김선우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게으른 독자는 그저 크게 달라진 열 곳에나 주의를 기울였을 따름입니다. 이제 그 열 곳의 이야기를 열 번에 나누어 해볼까 합니다.

 

3. 프롤로그-“노을 지는 수미산 서쪽 산봉우리가 분홍 연꽃처럼 층층이 벌어지고 있었다.”(6쪽)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새 책의 서막이 새롭게 열립니다. 여기서 새롭게 그려지는 바리는 열네 살짜리 소녀입니다. “여자라서 버려진 아이가 정말 여자가 된다는”(14쪽) “첫꽃”(14쪽)에 관한 이야기가 프롤로그 전체를 “분홍 연꽃” 빛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이 이야기 전체의 주제가 개짐 속에 깃든 “첫꽃” 송이처럼 조심스럽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 것일까. 태어난 것들은 왜 죽는 것일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정말로 하늘나라의 별이 되는 걸까.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목숨이라는 말. 버려진다는 것. 보살핀다는 것.......”(14쪽)

 

아시다시피 바리데기(공주) 설화는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체에 두루 전해오는 서사무가입니다. 말 그대로 버려진 딸이 자신의 설움과 원한을 품어 녹이고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되살린 뒤 모든 부귀영화를 떠나 삶과 죽음의 어름에서 버림 받은 존재를 보살피는 무조신巫祖神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는 대척점에 서는 민중적 내러티브로서 우리 사회역사공동체 흔히 민족이라 일컫는  고유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인연 닿는 대로 풀어낼 참인데 원효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원효사상은 붓다 어법으로 녹여낸 우리 고유의 사상, 곧 바리데기 사상입니다. 거꾸로 말씀드리면 바리데기 설화에 담긴 사상을 원효가 그 당시 최고급의 보편 담론으로 다시 풀어낸 것이 바로 일심-화쟁-무애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40년에 걸쳐 법학-신학-의학을 구도적으로 공부하면서 찾아낸 진실입니다. 지금 제 의학은 원효사상이자 바리데기사상이자 한사상에 터 잡아 세워져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제가 쓴 <인문과 한의학이 치료로 만나다>가 책으로 나옵니다. 이 책은 인문적 인식 지표로서 원효 이야기가 주를 이루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위주로 책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데기 이야기, 원효 이야기에서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다름 아닌 요석 이야기입니다. 다시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바리공주는 요석공주와 은유 이상의 일치 관계를 지닙니다. 바리공주 전승과 요석공주 이야기는 고갱이 부분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요석공주의 출생에 대한 문제점, 무장승과 원효, 세 자녀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원효와 요석 사이에는 설총 말고도 자녀가 둘 더 있었습니다., 요석의 출가 등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만일 요석의 눈으로 원효를 다시 보면 붓다 어법을 벗어버린 바리데기 어법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석을 국무國巫 또는 그와 유사한 위상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직관합니다. 이런 직관은 교과서적 역사 지평에서 수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바라거나 상상하지 않습니다. 오직 제 무의식에 살아 숨 쉬는 바리데기 내러티브와 역사적 사건의 어떤 특정한 만남을 떠올릴 때 요석을 그렇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진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김선우가 불교신문에 원효 이야기 <세 개의 달>을 연재하고 있을 무렵, 다음에는 요석 이야기를 써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선우는 깜짝 놀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내쳐 바리데기 이야기를 꺼내자 김선우 입에서는 어느덧 “도반”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김선우와 저는 도반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먼저 바리데기 이야기를 냈고 가을께 원효 소설이 마무리되어 나온다고 했으니 기대가 큽니다. 저는 먼저 원효를 책으로 내지만 바리데기 이야기는 아직 기약이 없습니다. 김선우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저는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서둘러 바리데기 사상을 인문학과 의학으로 마주 놓아 쓰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제 글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또 읽기 불편한 논문 같은 글을 불친절한 어투로 써댈 것이 틀림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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