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쓰레기통은....... 버려지는 것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을 ‘담는’ 통이라는 이율배반을 지니고 태어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쓰레기통에는 부정된 것들을 긍정하는 자의 힘이 있다. 버려지는 것들을 보듬어 안는 것을 자기의 운명으로 당당히 수용한 자가 보여주는 적극적인 긍정의 세계. 그 힘은 명예나 부, 권력, 공명심 등과 거리가 멀지만 그것들보다 힘이 세다. 더 근원적이다....... 그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며 진지한 쾌락주의자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자기애를 실천할 줄 안다.”(169쪽)


단도직입으로 말하거니와, 쓰레기통을 그린 이 말은, 김선우가 빚어낸 수많은 말의 집장태(集藏態)다. 살아 있는 날 것의 몸과 마음 냄새를 맡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말에 전율했을 거다. 뭐, 그가 쓴 어휘는 누구나 다 아는, 그저 그런 거다. 이율배반, 부정, 긍정, 근원, 현실주의, 쾌락주의, 행복, 자기애....... 그러나 말이란 드러내진 어휘가 아니다. 그 연결도 아니다. 그 의미도 아니다. 말은, 어휘와 연결과 의미, 사이의 허공, 바로 그것이다. 허공을 흐르는 김선우의 그 말을 건져본다. 일심(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 이내 떠오르는 무조건의 그 이름, 원효! 그렇다. 쓰레기통 원효.


쓰레기통은 냄새다. 형언하기 어려운 혼돈....... 죽음과 삶이 뒤엉켜 춤추는 저 도저한 가장자리 냄새 말이다. 비릿하고 시큰하고 짜고 쓰고 들척지근하고 매캐하고 퀴퀴하고 곰곰하고 지리고 텁텁하고 아리고 니글거리는....... 가장자리의 혼향(魂香)들! 생명이 다해 주검으로 고여 들고, 주검에서 생명이 꼬물거리는 불가사의한 냄새다. 이 역한 진창에서 피워내는 연꽃 한 송이, 그 연꽃 중의 연꽃, 분황, 원효다. 원효란 말 한 마디도 쓰지 않고 길어낸, 아니 쓰레기통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진실의 고갱이를 포착한 김선우의 생각 힘은 가히 한 소식 전한다 할만하다.


김선우가 전한 소식의 요체는 뭔가. “부정된 것들을 긍정하는....... 근원적....... 현실주의....... 쾌락주의”다. 빠르게 훑으면 이 말엔 별 게 없다. 찬찬히 저어 보면 낭랑-흐림, 출렁-고요, 촐삭-거룩이 담겨 있다. 모순의 공존, 역설의 회통이 가라앉아 있다. 요즘 사람들은 뭐든 빠르게 훑는다. 그래서 빠지는 함정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긍정주의다. 김선우의 이 말도 빠르게 훑으면 마치 긍정주의인 것처럼 보인다. 오해를 막기 위해 나는 위 인용문 첫머리에서 낙관주의라는 단어를 뺐다. 문맥을 살피면 이율배반이란 단어가 끌개 되어 긍정주의에 빠지지 않고 대칭성이 유지된다.


긍정주의란 무엇인가. 저 「시크릿」이란 책에 그려져 있듯, 否定적인 것은 버리고 긍정적인 것만 부여잡아라, 간절하게 원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리니 믿고 나아가라, 뭐 이런 이야기다. 한 마디로 초일극집중구조 신앙을 세속화한 교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삿된 길이다. 세계의 진실, 저 대칭구조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것을 버리면 안 된다. “부정된 것들을 긍정하는....... 근원적” 자세가 바른 길이다. 참 긍정은 부정을 기꺼이 껴안는 것이다. 부정을 껴안은 긍정은 긍정-부정의 이분법을 깨뜨린다. 이분법 깨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김선우의 “현실주의”다.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을 깨뜨리면 세계는, 나는 긍정과 부정의 역동적 가장자리 어디엔가 자유롭게 노니는 확률론적 不定(uncertainty)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게 김선우의 “쾌락주의”다. 세계는 궁극적으로 놀이다. 생명은 궁극적으로 놀이다. 놀이는 결국 쾌락이다. 이 도저한 원형질 쾌락을 열반이다, 극락이다, 구원이다, 천국이다....... 한 것일 뿐이다. 원효는 이를 무애춤으로 구현했다. 무애춤은, 적어도 김선우 관점에서는, 쓰레기통 춤이다. 아니 쓰레기통이다. 김선우 쓰레기통은 긍정과 부정, 선과 악, 나와 너의 경계를 가로질러 번져가는 自利利他의 운동이다.


자리이타 운동의 개념 내포에는 쓰레기가 없다. 타자가 거대한 쓰레기로 변한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 사유와 문명의 체계로 무장되었기 때문이다. 탐욕의 체계에서 타자는 다만 소비 대상일 뿐이다. 이런 소비에는 필연적으로 쓰레기가 따른다. 그중 가장 참담한 쓰레기가 바로 음식물 쓰레기다. 다른 생명으로 자기 생명을 유지하면서 인간이 먹는 것에 경외심을 지니지 않으므로 다른 인간 생명에게도, 음식으로 삼는 생명에게도 쉽게 부정의 평가를 내리고 버리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제 문득 김선우의 쓰레기통 앞에 앉아 김선우의 두려움, 김선우의 질문을 깊이 음미해볼 일이다.


너무도 난폭하게 회의 없이 던져지곤 하는 음식물 쓰레기라는 말 앞에서, 넘쳐나는 식탁의 풍요와 쓰레기통 사이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이 몇 십조 원의 돈 낭비라는 돈의 수치로 환산되어야 아, 그렇구나, 자각하는 세태 속에서, 지구의 한쪽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물이 천문학적 수치에 육박할 때 한 끼니의 밥조차 얻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도대체 우리가 구해야 할 용서가 어디까지일지 두려워진다. 지금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도대체 쓰레기란 뭐지? 자기 몸속에 받아 안은 것들을 연민하며 누군가 중얼거린다.”(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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