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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술은 봄 술이 제격이다. 내게는 그렇다....... 좋은 한낮에 꽃나무 아래서 마시는 낮술도 봄이라야 제격이다.”(161쪽)
내가 낮술을 시작한 것은 대학 일학년 봄이었다. 골초에 모주꾼인 기숙사 식당 아주머니 덕분이다. 어머니뻘인 그 평양 아주머니는 자궁암 말기 선고를 받자 인생을 포기하고 술 담배를 배웠는데 의사가 제시한 시한이 지나도 쭉 살고 있기에 병원 가보니 종양이 없어졌더란다. 술 담배가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인 셈.
나로 말하면 ‘술’ 소리만 들어도 잠자다가 팬티 바람에 벌떡 일어날 만큼 이미 유명 짜한 꼬맹이 모주꾼이었다. 술친구를 한눈에 알아 본 아주머니는 점심 식사 준비할 때 안주꺼리가 되는 게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나를 불렀다. 주방 한 가운데 단출한 주안상(?)을 마련하고 영락없이 모자지간 같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마시곤 했다.
그 봄에 시작된 낮술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아니 확장되어 요즘은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술을 한다. 술을 마신다기보다, 요즘 말로 ‘애정하는’ 나를 보고 아내가 묻는다. 당신에게 술은 뭔가? 내가 단호히 답한다. 엄마지. 아내가 나지막이 한숨을 쉰다. 모자지간 생이별시키면 벌 받겠네.......
그 동안 이렇게 내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흘러나간 술은 풀장 하나는 족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빨간 병뚜껑 진로 소주에서 고급 싱글 몰트 위스키 맥캘런까지 온갖 종류의 술이 지나갔다.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이 마신 것은 물론 소주다. 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잘 어루만지는 술은 단연 막걸리다.
죽음과 한두 뼘 거리에 있는 어르신들의 통증과 하루 내 있다가, 마지막 두어 시간 우울, 불안, 강박, 편집.......각종 마음 아픈 이들과 상담하고 나면 온 영혼이 갈증에 휩싸인다. 저녁 식사 시작하기 전, 잔 가득 술을 붓고 벌컥벌컥 소리 내면서 천천히 끝까지 마시는 동안 갈증은 서서히 떠난다. 이런 마음으로 이렇게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술이 막걸리다.
우리 세대의 막걸리 추억은 양은주전자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막걸리 받아오라 하시면 으레 빈 양은주전자를 들고 양조장으로 나서기 마련이다. 여기서 끝나면 추억이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꼴깍거리며 도둑 술을 마셔야 추억이 된다. 그러고 보면 최초의 막걸리 잔은 주전자였다!
막걸리 잔으로는 막사발이 제격이랄 수도 있지만 요즘은 오히려 양은 양재기가 갑인 듯하다. 하지만 뭐 국 대접도 좋고 냉면 그릇도 좋다. 내가 집에서 마실 때 쓰는 잔은 나무로 만든 작은 국 대접이다. 국 대접이라지만 그것은 국은 물론 숭늉, 물김치, 식혜, 그리고 특히 막걸리 담기에 두루 편하다. 내겐 이 잔이 최고의 잔이다.

나는 이 잔을 볼 때마다 시 한 수를 떠올린다.
배는 뜨기 위해
제 속을 다 파낸다
너는 뜨기 위해
속을 다 파내 본 적이 있는가
변명은 하지 마라
운이 있다고 하나
그건
준비된 자의 덤일 뿐이다
박순길의 <준비>
내 막걸리 잔인 이 작은 국 대접은, 내 눈에, 뜨기 위해 제 속을 파낸 배로 보인다. 속 파낸 자리에 사람 태운 배가 강을 건너가는 일은 술을 가득 채운 잔이 사람 마음을 달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비우는 것은 어차피 채움의 바깥 면이다. 배든 잔이든 빈 공간은 또 다른 즐거움을 창조하기 위한 것일 터이므로.
내가 속 파낸 배에 막걸리를 가득 따를 때, 벌컥벌컥 소리 내어 마실 때, 행복한 음감(飮感) 사라지는 경계 무렵에 김치 한 젓가락 집을 때, 문득 김선우의 궁금증이 떠오른다. 그 궁금증으로“감각의 기원”을 묻는다, “잔 하나가 구현해가는 탐미의 방식”을 들여다본다.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작은 잔 하나씩을 가지자. 자기의 잔을 지니고 꽃나무 아래로 가자. 꽃나무 아래 잔과 독대하며 감각의 기원을 물어보자. 술이나 차를 채우거나 꽃잎을 받으면서 오종종한 작은 잔 하나가 구현해가는 탐미의 방식을 들여다보자. 산다는 것이, 환장할, 봄에, 그 정도는 탐하며 살아도 좋지 않겠는가.”(163쪽)
막걸리 아련한 흐름이 몸 한 바퀴 돌 즈음 “산다는 것이, 환장할, 봄에, 그 정도는 탐하며 살아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너그러움으로 누군가 초대하려고 손 전화를 집어 든다. 문자를 두세 사람에게 보낸다. 답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 는적는적 탐하는 시간 뒤에 무엇이 서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한 잔 해야지
붉은 얼굴로 나서고 싶다
바람을 피하면 또 바람
모래를 퍼내면 또 모래
앞이 막히면 또 한 잔 해야지
타는 눈으로 나아가고 싶다
목마른 가슴은 아직 우리들의 것
어둠이 내리면 어둠으로 맞서고
노여울 때는 하늘을 보고 걸었다
이시영의 <바람이 불면 >
다시 잔 가득히 술을 따른다. 삼일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