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름도 모른 채 긴 세월 동안,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우울장애에 시달리면서 한 가지 스스로 깨달은 것은 내가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후각 기능이 뛰어나다, 뭐 이런 유의 이야기가 아니다. 냄새와 감정의 연결이 기민하다, 이게 핵심이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낸다. 그 기억은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감정을 즉각 재현시킨다.


대뇌에는 변연계와 피질의 경계에 자리 잡은 편도체가 있다. 이 편도체는 감정의 외상(trauma)을 저장하고 방출하는 일을 하는데 시각, 청각, 미각, 통각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오직 후각에만 반응한다. 이러한 뇌 의학적 사실을 알 리 없건만 김선우는 놀랍게도 이런 통찰을 해내고 있다.


후각은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에 가장 핍진하게 밀접해 있는 감각이며 가장 능동적으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감각이다.”(130쪽)


요컨대 내가 냄새에 민감한 것은 후각에만 반응하는 편도체가 과민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도체가 과민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내게 감정의 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상으로 나타난 일련의 증후를, 나에 관한 한, 강박우울장애라고 서구 정신의학은 명명할 수 있다. 내 병식(病識)은 이렇게 거꾸로 구성되어갔다.


내게 어두운 감정을 몰고 오는 냄새는 대개 어둡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축축함이나 물기와 관련이 있다. 팥쥐 엄마처럼 독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떠난 계모 한 분, 그리고 아동기 청소년기를 보낸 서울의 돈암동 산동네 주거 환경이 그 냄새의 진원지였다.


그 계모는 자신과 자신이 낳은 딸, 그러니까 이복 여동생이 사용하는 요강 청소를 꼭 내게 시켰다. 요강은 일반적으로 소변을 위한 것이지만 그 두 사람의 요강에는 대변도 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사내아이가 계모와 이복 여동생이 눈 똥, 오줌이 담긴 요강을 들고 마당과 거리를 지나 산동네 한가운데로 흐르는 계곡의 노천 하수에 가서 그 오물을 버린 다음 돌아와 찬 수돗물에 요강을 부시고 수돗가 한 쪽에 놓인 축축한 걸레로 닦는 광경을 그려 보라. 뒤섞인 똥과 오줌, 노천 하수, 걸레가 들이미는 그 형용 못할 냄새에 대한 기억은 거듭해서 원한과 수치심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오랫동안 하루에 수십 번씩 손을 씻어대는 강박행동에 시달리게 했다.


산동네 전세방을 전전하며 살 때 어린 소년의 코를 괴롭힌 또 다른 한 가지 냄새는 방수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방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였다. 그리고 한구석에 놓인, 마치 그 방을 구겨놓은 상징물 같은 걸레의 냄새였다. 두 냄새는 사실 하나다. 사시사철 축축한 쪽방에서 그 냄새를 맡으며 늘 보송보송한 방을 꿈꾸었다. 어른이 되어 내 삶을 살 때부터는 언제나 그 보송보송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다가 문득 변화의 날이 들이닥친다.


나이 마흔 다 될 무렵 무남독녀 외동딸이 태어났다. 건조의 극치인 콘크리트 아파트에서 신생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습도였다. 인공 가습기가 안 좋대서 기저귀 서껀 온갖 아기 빨래를 집안 곳곳에 만국기처럼 걸었다. 당연히 조그만 아파트 공간 전체는 호답지근한 습기에 휘감기고 꿈의 보송보송함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더군다나 아기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청소기 대신 하루 몇 번씩 걸레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걸레는 삶아도 이상하게(!) 그 즉시 냄새가 난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은. 그 냄새는 아마도 걸레의 raison d'être일 터이다.


....... 무릎을 바닥에 모으고 오체투지하는 자세로 걸레질을 한다. 걸레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는 자세는 기묘한 정신의 각성을 불러오곤 한다. 걸레 냄새를 코앞에서 맡을 때도 있다. 퀴퀴하면서도 어딘지 흙냄새를 닮아 있는, 걸레 냄새는 시들어가는 것과 피는 것의 순환을 담지한 냄새다. 쇠락과 재생은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다. 걸레는 연관되어 있는 세계의 순환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걸레는 저물고 뜨는 것들의 경계에서 지상의 얼룩을 지우고, 공간은 흘러간다. 나는 걸레가 지나간 자리가 꽃피는 것을 엎드려 오래 바라본다.”(136-137쪽)


딸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내게 일어난 “기묘한 정신의 각성”은 가령 이런 변화와 맞물린 것이다. 축축함과 따뜻함의 결합, 그리고 학대 받은 아이자아에서 보살피는 어른자아로 바뀜. 그렇다. 내게 위로이자 치유로 다가온 이 변화. 변화는 경계에서 일어난다. 경계 사건은 각성이다. 각성은 생명의 꽃이다. 


어린 딸아이의 생명이 피어서 뜨고, 내 상처와 질병이 시들어 저무는 경계의 시공을 축축한, 음.......^^, 그러니까, 습. 습. 한. 걸레가 지나가며 꽃을 피워냈다. 하여 “엎드려 오래 바라본다.”는, 바로 이 김선우 자세가 숭고하고 관능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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