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태어나 삼칠일을 무사히 넘기고 어린 내가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동안 나는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기들의 배냇저고리는 소매가 길다. 긴 소매 째로 두거나 소맷부리를 묶어주거나 했던 배냇저고리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생김새는 아기의 손톱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막 자라나기 시작한 손톱으로 아기가 제 얼굴을 스스로 할퀼까 봐.”(125쪽)


선친께서는 손톱을 뾰족동글하게 깎는 습관을 지니고 계셨다. 어린 시절 내가 그 까닭을 물었다. 젊은 날 주먹으로 사람을 때려 봤는데 당신 손에 살(煞)이 있더란다. 그 뒤 더는 사람을 때리지 않으려고 손톱을 그렇게 깎는다는 거였다. 그런 마음 자세를 본받을 만하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나도 자연스레 손톱을 뾰족동글하게 깎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손톱을 동그랗게 깎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아버지가 된 날부터다.


딸이 태어난 것을 계기 삼아 사람을 때리기로 결심해서가 아니다. 아기를 돌볼 때, 특히 목욕시킬 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어서였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것은 딸아이가 첫돌이 될 때까지 젖먹이는 일 말고 모든 육아를 내가 했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해 내 손 탈 나이를 넘어서자 나는 본디 습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다시 손톱을 동그랗게 깎기 시작한 것은 한의대 입학한 얼마 뒤부터다.


한의학도가 된 것을 계기 삼아 사람을 때리기로 결심해서가 아니다. 진단과 치료에 손을 써야 하는데 손톱 끝이 뾰족하면 진단 오류는 물론 치료 시 통증을 유발할 수 있어서였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것은 내가 복부 진단을 중시하는데다 우울증 환자나 사고 당한 후유증 있는 환자에게 수기(手技)치료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손톱을 동그랗게  자주 깎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 습관이 다시 바뀔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면 아기와 환자, 특히 마음 아픈 환자는 근본적으로 닮았다. 모든 마음의 병은 상처 입은 시점에서 성장이 멈춰버려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는 이른바 발달불균형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병은 결국 양육의 문제다. 아기 엄마에게 주어진 과제와 마음 치료 의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렇게 하나가 된다. 내가 가사와 육아를 통해 모성 또는 여성성으로 스며든 것은 미상불 숙명이었다.


요즈음 스물여섯 난 젊은 여성과 두 달째 치유상담을 하고 있다. 아홉 살 때 입은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질 못 한다. 겉은 스물여섯 살이지만 속은 아홉 살이다. 물론 내게 오기 전엔 그 둘이 뒤엉켜 어떤 성찰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둘을 떼어놓기 시작하면서 치유는 여울목 하나를 통과했다. 그를, 그 아이를 위해 나는 내 영혼의 손톱을 동그랗게 깎고 또 깎는다. 그의 엄마, 내 말 듣고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아직 손톱 들여다볼 엄두는 못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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