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은 여성들도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니지 않는 세상이다. 도무지 손수 바느질 할 일이 없으니 그럴 밖에. 그런 와중에도 남성인 나는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닌다. 물론 나 또한 쓸 일은 거의 없다. 쓸 일이 거의 없지만 꼭 자리 잡고 있는 양복 윗주머니처럼 내 바늘 쌈지는 시간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나와 늘 동행한다. 내가 늘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니는, 바느질도 웬만한 여성보다 잘 하는, 데는 그만한 곡절이 있다.


아버지가 이삼년이 멀다 하고 이혼 재혼을 거듭하는 동안 집안일은 연로하신 할머니 몫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그런 모습 지켜보는 할머니의 신산한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드릴 수 있는 내 나름의 배려는 집안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느질이었다. 지금이야 이불 같은 것도 바느질이 필요 없도록 만들지만 그 시절엔 일일이 호청을 빨아 다림질해서 꿰매야 했다. 해진 옷가지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바느질 이전에 버리거나, 필요한 경우 세탁소 아니면 수선 집에 맡기면 그만이다. 그 시절엔 몇 번씩 꿰매 입었다. 바느질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바늘에 실 꿰는 간단한 일로 시작했다. 나중엔 아예 이불이며 옷이며 양말에 이르기까지 내가 맡아서 바느질했다. 그러는 동안 내 바느질 솜씨는 어느덧 어설픈 단계를 넘어섰다. 급기야 할머니가 보조.^^ 보조로 물러앉으신 할머니는 끝내 원래 자리를 되찾지 못하셨다. 생애 가장 끄트머리에 치매가 시작되셨던 거다. 그러나 당신 내의조차 제대로 깁지 못 하시는 상태에서도 바늘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치매와 맞붙어 싸우셨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게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실패한 바느질을 되살리려 애쓰시던 모습은 지금도 그렁그렁 내 영혼에 맺혀 있다. 

 

내가 지니고 다니는 바늘 쌈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마치 할머니 분신이기나 한 듯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녔다. 결혼 전 20년 가까이 홀로 사는 동안은 물론이고 결혼한 뒤에도 여전하다. 바늘 쌈지만 지니고 다니는 게 아니다. 실제 지금도 바느질을 한다. 솔기만 뜯어졌을 뿐 버리기 아까운 옷가지나 작게 구멍 난 양말 정도는 기워서 입고 신는다. 긴 세월 이렇게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여성성이 내게 자리 잡은 듯하다. 옛날 제자들한테는 엄마 같은 스승으로, 지금 아내에게는 영화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이 한 말 그대로 ‘아내 같은 남편’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니 말이다.


바늘, 이것은 아마도 내 운명, 아니 내 자신이지 싶다. 바늘 쌈지와 바느질에서 배어 나오는 여성성은 최근 십여 년 동안, 또 다른 인연으로 내 인격과 인생에 깊게 자리 잡았다. 바로, 침(鍼), 그것이다. 바늘보다 더 낭창낭창한 이 쇠붙이는 바늘과 달리 그 귀가 침놓는 사람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본질은 같다. 침은 사람 몸을 뚫고 들어가 통증을 가라앉히고 막힌 기혈을 소통시킨다.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외연) 결국은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것이다(내면).


예리한 바늘 끝과 다소 뭉툭한 바늘의 귀, 극도로 심플한 바늘의 몸은 이 두 극점으로 자신의 외연과 내면을 소통시킨다.”(86쪽)


어디서 이런 사유가 나왔을까. 김선우의 생각 힘에 감탄하면서 거기 힘입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내 상상력은 바늘이 양성구유의 완전체를 형상화한 것이라 여긴다. 예리한 끝과 둥근 구멍은 각각의 성기다. 예리한 끝은 관통하며, 둥근 구멍은 흡수한다. 관통과 흡수, 이것이 생명의 요체 아니던가. 바늘은 관통으로 시작하여 흡수로 끝나는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늘은 자기 몸에 실을 꿰고 온 몸으로 옷감-현실을 관통한다. 그리고 숨는다. 바늘은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늘에게는 아상(我相)이 없다. 찢어지고 떨어지고 조각나고 해진 것들을 이어 붙이고 매달아주고 기워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한다. 바늘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이어 붙이고 부활하게 한 옷감으로 증명된다.......”(86쪽)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하는, 이 붓다 급, 그리스도 급 흡수라니!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 가운데 나는 의자(醫者)가 이런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바꿔보자.


“의자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치유하고 건강하게 한 환자로 증명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의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자아를 증명한다. 물론 돈 때문이다. “죽음의 신은 목숨만 가져가지만 의자는 돈까지 가져간다.”는 인도의 고대 속담은 교통사고와 자살로 죽는 사람보다 의료사고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벽하게 의미롭다. 사람 건강과 목숨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부패한 의자들의 영혼에게 김선우의 바늘은 숨은 자의 글썽이는 꿈으로 웅숭깊이 은유 되어지이다.


자기의 온 몸으로 자기를 넘어가는 바늘의 흔적은 고요하다.”(8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